유두 안녕
정확히 3주 만에 반복되는 일정이다. 토요일 PCR 검사(4월 29일), 일요일 입원(4월 30일), 월요일 수술(5월 1일).
역시 경력직의 짬밥!! 한번 해 봤다고 절차마다 속도가 빨라졌다. PCR 검사는 오전 8시 30분부터 시작이지만, 미리 가도 검사를 해 준다는 걸 경험으로 알았다. 8시 10분 즈음 병원에 갔다. 검사실도 헤매지 않고 한 번에 직진, 콧구멍 슝슝, 신속하게 검사를 끝냈다.
일요일 오전 9시. 입원 안내 전화가 온다. 호텔 객실 예약하듯 능숙하게 입원실 상황을 묻고 병실을 일 인실로 바꿨다. 다음은 짐 싸기. 입원에 필요한 물품을 하나하나 조사하고 수첩에 적으며 확인하던 과거의 나는 안녕. 슥슥 착착 고민할 것도 없이 단숨에 캐리어를 채웠다. (이번엔 효자손도 잊지 않기!)
병동 입구에 도착했다. 어리바리하게 인사도 제대로 못했던 지난번과는 다르다. 쿨하게 신랑에게 인사하고 병동 안으로 들어갔다. 해외 출장 자주 다니는 워킹맘이 출국장 들어가듯, 캐리어를 끌고 여유롭게.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풍광이 펼쳐졌다. 엘리베이터 앞 의자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환자들, 탕비실 바닥을 부지런히 닦고 계신 여사님, 무빙워크를 걷듯 빠르게 움직이는 의료진들... 이 모든 게 낯설지 않다.
쭈뼛쭈뼛 데스크 앞에서 간호사님께 도움의 눈빛을 보내던 신입 때와 다르게, 경력직 환자는 본인 입원실로 망설임 없이 직진했다. 노 룩 패스로 캐리어를 휙~밀어 넣고 재킷까지 벗어던진 후, 가벼운 몸으로 데스크에 가서 외친다.
"저기 체크인, 아니 입원하러 왔는데요."
오리엔테이션과 설문 조사는 3주 전에 입력해 둔 정보 덕분에 일사천리로 끝났다. 그새 키가 컸을 리도 없고 남편이 바뀌지도 않았으니 딱히 수정할 부분이 있을 리가.
병실로 돌아왔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킨 후, 지난번 경험을 살려 가져 간 짐들을 최적의 위치에 세팅해 놓았다.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셀카를 찍는 여유까지. 그래, 또 한 번의 호캉스다!!
똑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간호사님이 들어오셨다.
"000 환자님, 안녕하세요. 내일 수술 일정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근데... 우리 저번에 뵌 적 있죠? 어머 어머!!! 반가워요!!!!"
"네, 맞아요. 하하하.... (이렇게 빨리 다시 만나게 될 줄은 몰랐지만)"
퇴원하는 날 병실까지 찾아와 명랑한 에너지를 뿜어내며 인사하던 그 간호사님이 내 손을 덥석 잡고 동그라미를 그리며 반가워했다. 마치 유럽 배낭여행지에서 신나게 놀고 헤어졌던 한국인 여행자를 홍대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암 병동에서도 이리 반갑게 인사할 수 있구나. 나도 같이 원을 그리며 화답했다.
수술은 내일 오전 8시 30분에 시작한다. 저번엔 젊다고 순서가 뒤로 밀렸었는데 이번엔 1등이군. 짧게 끝나는 수술이라 맨 앞이 됐나? 아무튼 공복의 고통이 줄었다. 오후 2시 수술은 힘들었다. 수술 후 첫 끼니가 밤 11시 30분에 나와서 하루 종일 굶다시피 했었다.
화장실에 들어가 거울 앞에 섰다. 내일이면 사라질 왼쪽 유두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다. 안녕. 그동안 고생했어. 지난번 수술 때, 판판해진 가슴에 너라도 붙이고 나오니 충격이 덜 하더라. 3주 동안 나 조금은 단단해졌어. 널 보내도 마음이 부서지지 않을 만큼. 그러니 이젠 진짜 안녕. 잘 가...... 근데 너 함몰이라 모유 수유할 때 엄청 힘들었던 거 알지?
뒤끝 있는 마지막 멘트로 이별식을 끝냈다. 너무 깊게 감정의 골을 파진 않기로 했다. 담담히 별거 아닌 듯 보내주기. 너무 크게 의미를 두지 않기. 안 그러면 우울의 블랙 홀로 빠지기 쉽거든... 최대한 머릿속을 정돈하고 잠자리에 누웠다.
수술 날 아침.
간호사님은 이번에도 안 아프게 한 방에 수액을 꽂아줬다.(온 맘 다해 감사드립니다) 지난번과 달리 수술 전 검사는 없었다. 곧바로 휠체어가 들어왔다. 수술장으로 출발한다는 신호다.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면 심장이 두근두근 속도를 냈었다. 저 문이 열리면 수술장으로 직행이니까. 그런데 이번엔 생경한 경험을 했다.
수술장에 들어갈 때까지 놀라울 정도로 마음의 동요가 없었다. 타인의 수술장 가는 길을 티브이로 구경하는 기분이랄까.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는지 심장 박동기를 대보고 싶을 정도였다. 두려움, 서글픔, 걱정... 인간이라면 느낄 수 있는 모든 감정 세포가 뇌에서 다 빠져나간 상태. '평온'이란 표현이 적확하지 않을 만큼 '감정의 진공 상태'를 느꼈다.
수술실에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따뜻한 바람이 아래에서 올라와 온몸을 감싼다. 기분이 좋았다.
드라마에서 보던 엄숙하고 진지한 모습과는 달리 수술장은 밝고 활기가 넘쳤다. 일반 회사 사무실 아침 풍경이랑 다를 바 없었다. 의료진들은 주말에 있었던 소소한 얘기를 나누며 웃었다. '오늘 하루도 잘해봅시다!!' 하며 힘차게 서로를 응원하는, 그야말로 파이팅 넘치는 회사 분위기였다.
지난번 수술 때는 들어가자마자 마취 가스에 기절하는 바람에 몰랐던 수술장 분위기를 이번에 '제대로' 느꼈다. 마취과 선생님이 생각보다 늦게 오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수술실에 맨 정신으로 한참을 누워있었다.
주치의 선생님이 차라리 눈을 감는 게 어떻겠냐고 했지만, 나는 더 크게 뜨고 좌우를 두리번거렸다. 언제 또 이렇게 수술장을 볼 기회가 있겠어? 의료진도 아닌데.
"음악이라도 틀어드릴까요? 근데 수술 때 듣던 음악이 나중에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어서...."
"괜찮아요, 선생님. 근데 수술장 진짜 밝네요. 이렇게 환한 줄은 몰랐어요."
"그렇죠? 드라마 보면 수술실이 너무 어둡게 나오더라고요. 우린 이렇게 밝게 해 놓고 일하는데..."
"그러게 말이에요. 그런데 선생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진료실에서 못다 한 대화를 수술장에서 다 했다. 마취과 선생님 덕분이다.
수술은 30분 만에 끝났다.
2022년 5월 1일. 나는 44년 동안 함께한 왼쪽 가슴과 영원히 이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