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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보라 Oct 30. 2022

수술 후 최종 결과

추가 수술

세상에.     


악몽을 꿨다. 꿈에서 사람을 칼로 찔렀다.      


어릴 때 칼에 찔리는 꿈을 자주 꿨는데, 꿈에서도 칼에 찔리면 정말 아팠다. 하도 자주 꿔서 '이거 혹시 꿈인가' 싶을 때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칼침을 피할 순 없었다. 상대는 내가 깨닫는 순간보다 더 빨리 공격했다.       

신랑에게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람 죽이는 꿈을 꿨다.'라고 하자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그게 암이었나 보지."     


내가 죽인 건 '사람'이 아니라 '암'. 해몽이 맘에 들었다.  답이 명확한 수학 문제도 아닌데 굳이 부정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지. 신랑은 평소에도 이런 식으로 내 염려와 근심을 단박에 구석으로 치워 놓곤 한다. 사람이 참 단정해.     


수술 결과를 듣기 위해 병원에 갔다.  다학제 실 앞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앉을 의자 하나 없었다. 이들이 다 암 환자라니.  

    

가끔 내가 왜 암에 걸렸을까 억울해하다가도 병원에 오면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암 환자?' 하며 놀란다. 나의 동지들에게 애틋한 시선을 몰래 보내기도 하고 혼자가 아님에 위로도 받는다. 하지만 나보다 연세 지긋한 환자들을 보면 '난 왜 벌써 암 환자?'이러면서 다시 의기소침해진다.   

     

대기실에 앉아 흠흠, 목청을 가다듬었다. 노래하려는 것도 발표를 준비하려는 것도 아니다. 병원에 오는 날이면 어김없이 심해지는 역류성 후두염. 스트레스받은 위는 식도를 거쳐 후두까지 위산을 끌어올린다. 상처받은 후두가 기침을 한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해도 소용없다.    

 

오전 9시 30분에 결과를 듣기로 했는데, 10시가 되도록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혹시 누락됐나? 간호사님께 확인해 봤더니 오래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 달라고 했다. 다학제 실 앞 환자들이 전부 빠져나가고 나만 남았을 때, 드디어 이름이 불렸다.


 "000 환자님, 들어오세요."     


최종 선고를 들으러 가는 피고인의 심정이 이랬을까. 다학제 실에 들어가 앉으니 목덜미 위로 소름이 돋았다.      


정면에 있는 커다란 스크린에 눈이 갔다. 내 종양 사진이 떡! 하니 띄워져 있었다. 네 이놈!! 내 몸속에서 신나게 양분을 빨아댔던 파괴자가 너구나!!!      


어제 다학제 경험을 해봐서 그런지 큰 원형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진료과 선생님들을 마주하는 게 어색하지 않았다. 고개를 한 바퀴 죽 돌리다 주치의 샘과 눈이 마주쳤다. 반가워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녹음기 앱을 켰다. 혹시라도 중요한 내용을 놓칠까 봐. 하지만 녹음할 필요가 없었다. 선생님들 모두 환자와 보호자가 충분히 듣고 이해할 수 있도록 천천히 또박또박 말씀하셨다. 나는 수첩을 꺼내 필요한 내용을 적었다.      


양쪽 가슴에 다 암이 있다 보니 한쪽씩 설명하셨다. 그렇게 받은 최종 결과,     

*전이 없음: 감시 림프절은 양쪽 팔 2개씩 제거.     

*왼쪽: 최종 0기, 상피내암, 허투 중간.     

*오른쪽: 1기 초, 침윤암(0.9cm), 호르몬 양성, 허투 음성.(참고로 허투는 음성, 중간, 양성으로 나뉘는데, 허투에서 '양성'이 나오면 항암을 할 확률이 높다.)     


"순한 암이고 호르몬성이라 주사 항암은 안 할 겁니다."  

   

항암을 안 해도 된다!! 그 말에 심장 박동이 폭증하다 터질 것 같았다. 왼쪽은 상피내암이라 항암을 안 할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오른쪽 침윤암. 이놈 때문에 항암치료를 받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 만약 이놈이 크기가 크거나, 허투 값이 '양성'이거나, 호르몬이 ‘음성’이거나 겨드랑이에 전이가 있었다면 항암에 당첨될 확률이 높다. 다행히 이 모든 조건에 하나도 걸려들지 않았다!! 항암이 면제됐다.      


종양 크기도 수술 전 검사에서 쟀을 때 보다 작았다. 1.2~1.3cm를 예상했는데 꺼내보니 0.9cm였다. (1cm를 넘지 않았다) 허투 값은 '음성'이었다. 호르몬은 '양성', 양쪽 겨드랑이에 전이도 없었다.      


‘항암 치료는 필요 없다’라고 혈액종양내과 교수님이 말했을 때, 내 눈빛은 마치 사이비 교주에게 ‘네 죄를 사하노라~~’는 말을 들은 광신도 마냥 번쩍거렸다. 그 말을 믿습니다. 아멘.      


나랑 비슷한 암 성질을 가진 환자의 경우, 대부분 '항암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온코 검사'를 권유받는다. 그 검사에서 점수가 낮으면 항암을 피할 수 있지만, 점수가 높으면 항암 치료를 받아야 한다. 게다가 검사비가 사백만 원이 넘는다.(안타깝게도 아직 보험 적용이 안됨) 돈은 돈대로 쓰고 항암에 당첨되는 사람도 있다. 

     

내 경우 온코 검사도 필요 없을 정도로 '순한 암'이라고 했다. 암에게 '순한'이라니.'착한 빌런'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지만, 어쨌든 의사 선생님이 내린 결론은 항암 치료 의미 없음, 온코 검사 필요 없음. 사백만 원이 굳었다.      


앞으로 남은 치료는 방사선 20회, 항 호르몬제(타목시펜) 5년 복용. 항암에 비하면 어렵지 않은 치료 과정이다.       


하나님께 감사했다. 새벽마다 얼마나 울며 기도했던가. 살려달라고, 가정통신문 보호자 서명란에 사인해 줄 엄마가 없으면 울 아들 너무 불쌍하지 않냐고. 그때까지만이라도 살려달라고. 아니 사실은 그보다 조금 더 살고 싶다고. 아들 대학 졸업식에 학사모도 쓰고 싶고, 결혼하면 손주도 키우고 싶다고. 그런 기도를 할 때면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흐르다 통곡으로 변했다. 드레스 룸에 들어가서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고 울었다. 

        

치료 과정이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다 나은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오늘의 감격을 메모장에 기록했다. 잊지 말자, 오늘도 나를 지키시는 주님의 은혜를, 나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주신 그분의 사랑과 돌보심을.    

 

"그런데 말입니다."      


'그런데'라니. 이 시점에…… 불안하다 불안해. 의사 선생님이 말을 이었다.     

 

"왼쪽 상피내암이 유두 주변에 몰려 있었어요."     


왼쪽 가슴을 열어보니 상피내암 여러 개가 하필이면 유두 가까운 곳에 있었다. 제거는 했지만 살려둔 유두에 여전히 암이 남아있을 위험이 있다.    

  

다학제에서 선생님들은 두 가지 방법을 제시했다. 하나는 유두를 제거해서 주변에 남아 있을지 모를 암의 싹을 잘라내기. 차선책은 방사선 치료를 '세게' 해서 최대한 암세포 죽이기.      


방법은 두 가지였지만 의사 선생님들의 태도로 직감했다. 유두 제거 수술이 더 확실하게 암을 없애는 방법이 란 걸. 

     

주치의 샘이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지만 망설임 없이 '제거하겠다'라고 말했다. 다학제실을 나와 주치의 면담을 기다리는 동안 이미 신랑과 상의했다. 남편도 '제거'에 표를 던졌다. 가슴에 아직 '암 덩어리'가 남아 있을지 모른다면 방사선 치료로 죽이는 것보다 깔끔하게(?) 떼내버리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래야 향후 생길 재발 위험도 적다.     


수술을 받겠다고 하자 선생님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날짜를 잡으셨다.        


"수술은 5월 2일에 할게요."     


5월이라... 다음 달이니 다행히  여유가 좀 있군......  헉!! 뭐여? 이번 주 일요일에 입원이여??     


5월은 머나먼 미래가 아니었다. 다섯 밤만 자면 5월 2일이었다.    

  

3주 전처럼 토요일 코로나 검사, 일요일 입원, 월요일 수술 일정이 잡혔다. 그래도 그때보다는 조금 덜 무섭고 심란했다. 지금은 내 병에 대해 정확한 결과를 들었고 치료 방향도 알았다. 그렇다면 유두는 미련 없이 보내주자.(슬프지만 나중에 재건하지 뭐ㅠㅠ)     


진료를 마치고 주치의 샘 방을 나오는데 입가에서 옅은 미소가 흘러나왔다. 오른쪽 가슴에 이어 왼쪽에도 발견된 종양, 전 절제, 양측성 암이라 브라카 검사. 저 방에서는 늘 안 좋은 얘기만 듣고 울면서 나왔는데…….      

오늘 처음으로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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