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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재윤 Mar 13. 2024

에반게리온의 진짜 결말

2024년에 1997년 작을 봐야하는 이유

90년대 애니메이션 영화를 현대 극장에서 만난다는 건 색다른 경험이었다. 과거로의 시간여행보다는 지금 봐도 뒤지지 않는 연출과 이질감이 없는 작화 덕에 한국에 개봉한 것만으로도 기쁜 일이었다. 미스테리한 TVA 결말 때문이라도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EOE)을 찾아 극장으로 향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결말을 되풀이하고 독자들에게 주제를 상기시키고 있으며, 종말을 알리는 영화라는 생각에 다다랐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제목 그대로 에반게리온의 마지막 격인 작품이다.






EOE가 관통하는 주제

난 EOE야말로 에반게리온이 가진 주제를 노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말 많은 25, 26화보다는 보다 확실한 결말이며, 안노의 의도와는 다르게 더욱 열광했던 독자들에게 에반게리온의 주제를 다시 한번 강조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결과적으로 25, 26화와 EOE는 같다고 생각한다. 전자는 직설적 화법으로 주제만 명확히 전달하지만, EOE는 좀 더 스타일리쉬하게 겉모습이 꾸며진 아이돌 같은 작품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겉에 씐 스킨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이다.


이 스타일리쉬한 스킨 중 하나는 바로 에반게리온이라면 빠뜨릴 수 없는 연출력에 있다. 총 두 부분에서 감정의 요동침을 느낄 수 있었고, EOE에서는 주인공이라 해도 의문이 없을 아스카의 각성과 신지의 독백씬이다. 이 두 장면에서 안노는 우리의 감정을 극한으로까지 몰아붙이고 있는데, 특히 신지가 아스카와 대면 이후 등장하는 어지러운 연출들은 속이 메스꺼울 정도로 알 수 없는 불편감이 느껴진다. 그리고 후반 서드 임팩트 직후 등장하는 실험적인 화면들(실사)까지 교차하면서 머릿속에서는 물음표와 섬뜩함의 느낌표가 왔다리갔다리 묘한 기분을 유발하지만, 이 의미를 찾아 나서는 어드벤쳐 게임처럼 느껴지는 것이 바로 에반게리온의 매력 아니겠는가.






아스카와의 대면에서 신지는 아스카에게 마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신지는 관계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그런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았고, 스페어처럼 느끼는 아스카는 신지의 도움을 차디차게 거절하자 분노의 표출로 아스카의 목을 조른다. 그 모습은 마치 사회에서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을 안고 방으로 숨어든 오타쿠들의 모습을 상기시키고 있으며, 사회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오타쿠들의 내면을 다시 한번 대변하고 있다. 하지만, TVA 결말을 통해 알 수 있듯이 결국 이 세상도 살아봄 직하고 그렇게 차갑지만은 않다는 것. 결국 저 두려움은 신지의 망상에 불과하고 나는 이 장면이 EOE의 결말 부분에 귀결된다고 생각하는데, 마지막 문단에서 따로 기술해 보려고한다.






분위기가 굉장히 섬뜩하다

난해하지만 신지의 내면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한 부분이 바로 놀이터씬이다. 완성한 모래성을 다시 무너트림으로써 신지는 이유가 있어야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있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인형처럼 보이는 두 친구는 엄마를 좇아 세트장에서 나간다. 하지만, 친구들과는 다르게 신지를 찾는 이는 아무도 없고 돌아갈 장소도 없다. 신지는 놀이터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모래성이 없어야 자신이 이 자리에 있어야 할 이유가 성립되는 것이다. 네르프는 초호기와 싱크가 가장 높은 신지를 필요로 했다. 그리고 신세기를 맞이하기 위해서 도구로써 사용돼야만 했다. 매번 에바를 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신지지만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곳은 네르프뿐이었기에 돌아가길 망설였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서는 신지 그 자체를 사랑해 주는 어른은 없다. 그래서 신지는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지 못하고 사랑받기를 거부한다. "상처받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낫다."는 말을 남긴 채 최후를 맞이한 겐도처럼 말이다.




인간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그리고 물건이란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세상이 혼돈 속에 빠진 이유는 물건이 사랑을 받고 사람들이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 달라이 라마









서드 임팩트 과연 인류가 원하던 일일까

어찌저찌 신지의 흑화로 서드 임팩트가 진행되며 안티 AT 필드가 발동한다. 각자의 욕망에 따라 원하던 허상이 눈앞에 나타나 하나가 되어가려고 한다. 겐도와 후유츠키에겐 유이가 마야에게는 선배의 감정을 넘어선 리츠코가 휴가에게는 미사토가 그들의 결핍을 감싸안아 주며 가짜 행복을 선사한다. 도망친 곳에는 낙원이란 없다는 말이 있듯이 상처가 없는 세상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그어살>의 마히토가 자신의 상처를 징표처럼 멋지게 내보이며 현실을 직시했던 것처럼 이 세상은 그렇게 고결하지만은 않다. 부딪치고 깨지고 굳은 살이 베길 때면 성장한 나를 마주할 있다.


겐도의 거창해보였던 인류보완계획도 레이의 폭주로 인해 차질이 생기며 최후를 맞이한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 아버지가 왜 그렇게 아들을 못살게 구는 가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도 있었다. 겐도도 신지만큼이나 상처받기를 두려워하고 도망치는 자였다는 것을.






그렇게 신지는 내면에 있는 희망과의 독백을 거치며 도망친 곳에서도 그다지 좋은 일은 없었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리고 재차 세상에 부딪혀보기를 결심하고 서드 임팩트를 무르게 되는데, 바로 옆에서 깨어난 아스카를 발견하고 또다시 목을 조르며 분노를 표출한다. 자신을 거부했던 아스카의 허상이 떠오르며 거부반응이 올라온 것이다. 하지만 아스카가 신지를 밀어냈던 상황은 신지가 독단적으로 만든 내면의 이미지일 뿐이며, 실제의 아스카는 그런 신지를 이해하며 볼을 쓰다듬는다. 세상이 자신을 등졌다고 느끼고 단절했던 오타쿠들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안노는 아스카란 캐릭터를 통해 신지를 이해하고 감싸안는다.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리고 이제 진짜 세상 밖으로 나오라며 미래의 신지들에게 힘내자는 파이팅의 메시지를 다시 전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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