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든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가 막을 내렸다. 알만한 사람이야 다 알겠지만, <흑백요리사>는 재야의 고수 '흑수저' 셰프들과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 셰프라고 알려진 '백수저' 셰프들이 경력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맞붙는 요리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다.
요리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넷플릭스에 새롭게 뜬 <흑백요리사>를 그냥 지나칠 리 없었다. 9월 중순을 막 넘기고 시작한 <흑백요리사> 1-3화를 본 이후로 우리 부부는 다음 회차가 공개되는 화요일을 목이 빠져라 기다리며, 육퇴 후 함께 <흑백요리사>를 볼 생각에 매일 그렇게 마음이 두근거렸다.
<흑백요리사>를 볼 때마다 연출을 누가 했느냐며, 우리 부부는 감탄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거기에 셰프들의 현란하고도 정교한 요리 솜씨에 눈이 휘둥그레지기 일쑤였다. 숨 막히는 요리 대결 현장을 지켜보다가 나도 모르게 자세를 고쳐 앉게 되는 일도 다반사였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 보다가 한 회가 끝나버린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진담 반, 농담 반이라며 한숨을 크게 내쉬곤 남편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
"여보, <흑백요리사>에 나오는 셰프들을 보니까 말이야, 내가 공기를 너무 낭비하고 있는 것 같단 생각이 들어."
남편은 나의 우스갯소리에 폭소하였지만, 그래도 그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대번 알겠다고 했다. 내 두 눈으로는 셰프들의 바삐 움직이는 손을 따라다니면서도, 마음속으로는 나 스스로에게 어떤 열정이 있는지, 무엇을 위해 성실한 노력을 하고 있는지 묻고 있었나 보다. 그랬으니 그런 말이 툭 튀어나오지 않았을까? 셰프들이 내놓는 한 접시의 요리 안에는 그들의 요리를 향한 열정과 더불어 오랜 시간 쌓아온 성실한 노력과 실력, 그리고 그들의 삶이 고스란히 녹아있었으니까. 물론 현재아이를 키우며 살림하는 것을 가치 없다 여기는 것은 절대 결코아니었으나, 나 자신에게서 열정을 느껴 본 지 오래되었다 느끼기 때문이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모양으로 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리고 한 사람의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일들이 이루어지는 시기, 열매가 맺히는 시기 또한 다 제각각이라는 것도 말이다. 굳이 이 시점에서 나는 전업 주부에 애엄마로 살아가고 있는 나의 4년 차 결혼생활을, 아니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나의 오늘은 내 인생의 어느 지점쯤에 도달해 있을까 하며. 그리고 내게 주어진 재능이 무엇이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내가 잘하는 일이 무엇이며,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이냐고 물으며. 하지만 이렇게 질문을 던지곤 보통의 일상을 영위하기 위해 이내 잠들어야만 했다.
우리는 3주간 그 어느 프로그램을 시청할 때보다도 성실하게 <흑백요리사>를 시청했다. 어느덧 마지막 회차에 다다랐을 땐, 마치 월드컵 결승전을 앞둔 시청자들 같았다. 하지만 어떤 셰프가 우승을 할 것이냐보단 최후 2인의 셰프가 각각 어떤 요리를 만들어 낼 것인지에 더 관심을 쏟았다. 이미 그들의 실력은 충분히 증명되었기 때문이었다.
결과와 상관없이 최후 2인의 셰프가 요리에 담아낸 그들의 마음과 생각을 충분히 들을 수 있어서 참 좋았다. 그들의 이야기에 난 충분히 설득되었고 감동했으니 말이다. 요리를 통해 셰프 한 사람 한 사람을 알아가게 된 것만 같아 마음이 푸근해지기까지 했고.
<흑백요리사> 마지막 회 끝자락에는 이 경연에 참여했던 셰프들의 짧은 인터뷰가 나왔다. 경연 중 20인에 들었든 들지 못했든, 팀전에서 살아남았든 살아남지 못했든, 나에겐 모두 대단한 셰프들이었다. 나는 그들의 인터뷰를 들으며, 그들이 지나온 평범하고 지루하고 반복적인 일상들이 차곡차곡 쌓여 오늘의 그들을 만들었음을 알게 되었다.
결국 자신의 일상을 지켜낸 이들이 그들의 자리에서 반짝반짝 자신만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게 정말 맞는 길일까?', 수도 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걸어가던 그들에게 <흑백요리사>는 그들의 요리를 향한 사랑과 열정을 다시금 일깨우는 시간이었고, 앞으로 걸어가야 할 방향을 다시금 확인해 보는 시간이 되었다.
<흑백요리사>를 시청했던 3주가 나에게도 꽤 유의미한 시간이 되었다. 살림을 하고, 남편을 내조하며 아이를 키워내는 나의 매일 똑같은 일상이 여전히 차곡차곡 쌓이고 있음을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 달 전보다, 두 달 전보다, 1년 전보다 좀 더 능숙한 엄마로, 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을 발견하곤 할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많은 공기를 들이마셨다.
살림 및 육아에 있어서도 흑수저와 백수저를 나눠본다면 어떨까. 아마 이 땅에서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는 대다수의 엄마들은 해를 거듭하여 재야의 고수, 흑수저 엄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TV나 유튜브, SNS에서 핫한 육아 전문가나 엄마들, 유명한 살림박사님들은 백수저일 테고 말이다. 그런데 살림과 육아에 흑수저와 백수저가 중요한가? 아니, 그렇지 않다고 본다.
흑수저든 백수저든, 셰프는 요리를 할 것이고, 엄마는 육아를 할 것이며, 주부는 살림을 할 것이다. 어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내일도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할 일을 할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역할에 충실하며 가정을, 사회를 지탱하며 살아가겠지.
내게 스스로 던졌던 질문에, 나는 나의 일상에서 열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할 만한 퍼포먼스를 찾지 않겠다고 대답했다. 열정이 '어떤 일에 열렬한 애정을 가지고 열중하는 마음'이라면, 나는 실로 열정을 가진 이기 때문이다. 나는 남편을 애정하고, 나의 딸 조이를 애정하니까. 내일 아침에 해가 뜨면, 나는 하던 대로 부엌에 가서 건조된 식기를 정리하고 아침식사를 준비할 것이다. 그리고 남편을 출근시킨 후 조이를 등원시키겠고. 남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의 일상이 뜨거워 보이지 않더라도, 우리 각자의 편의와 유익을 내려놓고 꾸준하고도 성실하게 우리 가정을 적정 온도로 유지시키는 것이 사랑일 테니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합시다.
한 달 전보다도, 두 달 전보다도, 1년 전보다도 더 나아진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로 내 인생의 이 꽃 같은 시기를 가득 채워보자고 다짐해 본다. 그리고 나의 1년 후를 기대해 본다.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괜찮은, 나는 흑수저엄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