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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많은얼룩말 Sep 30. 2024

가을이 보낸 편지

가을에게 보내는 답장


사계절 중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단연코 가을이다. 그 이유를 묻는다면,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선선한 날씨 때문'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선선한 날씨 덕분에 산책하기도 좋을뿐더러 조이를 등하원 시키기도, 장을 보러 가기에도, 놀러 가기에도, 아니 그 무엇을 해도 좋지 않을까.


9월에 들어서자 태풍의 영향으로 비가 억수로 쏟아지기를 한두 차례, 이제야 더위가 꺾이는구나 싶었다. 추석이 되자 작년 이맘땐 이렇게 덥지 않았다 싶어 괜히 억울한 마음도 들었다. "선선해졌다 싶어 마음을 놓으면 다시금 땡볕으로 내 마음을 혼란시키는 이 계절의 이름은 무엇이란 말인가!" 하루에도 서너 번씩 하늘을 향해 물었다.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보냈던 탓일까. 9월의 끝자락이니 이쯤이면 가을이겠지, 마지못해 치부하고 있는 나는 여전히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른 아침 현관문을 열었을 때 느껴지는 바람이 선선하고, 조이를 등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꽤 높은 것으로 보아 가을이 온 것 같긴 한데, 해가 중천에 뜨기만 하면 피부에 닿는 햇빛이 아주 뜨겁고 따가워서 말이다. 이 얄궂은 기온차에 마음이 상하는 건 사실이다. 하지만 차창 밖 노란빛을 띠기 시작하는 논밭을 보자마자 마음이 누그러지는  보아하니, 나는 가을에게 더 이상 따지고픈 마음은 들지 않는 듯했다.


이러한 나의 마음을 알았는지, 가을이 내게 편지 한 통을 보냈다. 편지는 조이의 어린이집 가방에서 발견되었는데, 접혀있던 종이를 펼치자마자 내 눈에 다섯 글자가 들어왔다.


가. 을. 운. 동. 회.


그렇다. 가을 운동회 안내문이었다. '그래, 운동회는 무조건 가을운동회지.'라며 참석 여부란에 잘생긴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 넣었다. 그리하여 나는 가타부타하지 않고 남편과 함께 어린이집 운동회에 참석하기로 했다.


올해 가을은 조이와 두 번째로 함께 맞이하는 가을이다. 조이에게 가을운동회는 난생처음이겠지만, 우리 부부도 난생처음 학부모란 이름으로 가을운동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20개월 아이와 과연 운동회를 잘 치르고 올 수 있을까 걱정 반 기대 반의 마음을 가지고. 가슴팍엔 조이의 이름이 쓰인 스티커를 붙인 채로.




9월 27일 금요일은 '워라밸(워크라이프 밸런스) 데이'로 부대 퇴근시간이 4시였다. 어린이집이 부대 내에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부러 이 날을 운동회 날로 잡은 것이리라 생각했다(직장인 어린이집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운동회 시작 시간이 가까워지자 퇴근한 엄마 아빠들이 원에서 정해 준 흰색 티셔츠를 입고 여기저기서 걸어오기 시작했다.


오후 4시 30분, 어린이집 야외학습장에서 학부모들이 자리배치도에 따라 삼삼오오 자리를 잡았다. 남편과 나도 조이와 함께 노란씨앗반 자리에 착석했다. 공중에서 펄럭이고 있는 만국기를 보니, 운동회의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뜨겁고 따가운 햇살 아래서 태극기와 오륜기가 입장했고, 국민의례가 뒤따랐다. 그 후 어린이집 원장님의 간단한 인사말을 듣고 나서야 본격적인 운동회가 시작되었다.


프로그램에 앞서 몸풀기 시간을 가졌다. 도대체 몇 년 만에 듣는 건지 모르겠는, 추억의 '포켓몬스터' 노래에 귀여운 율동이 더해졌다. 아직 몸도 마음도 풀어지지 않은 학부모들은 이미 잔뜩 신난 아이들과 함께 선생님들을 따라 몸을 쭈뼛거리며 움직였다. 운동회란 것이, 아이들의 열심을 보고서도 망부석처럼 가만히 있으면 정 없는 부모가 되는 듯한 기분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와 남편은 조이의 부모라는 이름으로 열심히 따라 하다가 결국 진심으로 몸을 풀어버리고 말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포켓몬스터 주제곡을 몸풀기 곡으로 뽑으신 건 탁월했다고 본다.)


모든 순서와 안내는 어린이집 축구교실 선생님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시범은 체육선생님이 맡아주셨는데, 두 분의 케미와 에너지가 아주 남달랐다. 거기에, '우리 아이 담임선생님에게 저런 모습도 있구나?!'를 볼 수 있게 만드는 흥겨운 분위기는 쭈뼛쭈뼛하던 학부모들을 서서히 열혈부모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학부모 전체 게임, 원아 전체 게임, 엄마 게임, 아빠 게임, 원아 연령별 게임, 가족 게임 등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참여했다. 운동회의 꽃인 이어달리기에서는 3세 반 아이들부터 7세 반 아이들 중 대표 선수들이 나와서 이어달리기를 했다.


3세 반인 조이도 출전 선수였는데, 20개월 아이에게 목표 설정 능력이 아직 부족한 고로, 나는 조이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려야 했다. "언니에게 이 막대기를 넘겨줘야 해."라는 설명과 함께 말이다. 넘어지지 않고 도도도 잘 달린 딸아이가 어찌나 기특했는지 모른다.


조이와 제자리에 돌아와 엄마나 선생님의 도움 없이도 혼자 달릴 수 있는 연령의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이 바통을 들고 달리는 모습이 얼마나 진지했는지,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어린이집을 오가며 보았던 장난기 가득하고 어려 보이기만 하던 녀석들에게 그런 표정이 있으리라고 상상도 못 해봤으니 말이다. 그리고 조이가 몇 년 후에 저렇게 진지한 표정으로 바통을 든 채 전속력으로 달릴 모습이 그려져 기대가 되었다.


학부모 참여 이어달리기까지 하여 모든 프로그램은 종료되었다. 조이가 속한 베트맨 팀이 아쉽게도 이기지 못했지만, 사실 승패는 크게 상관없었다. 그건 우리 부부 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 팀이 이겼으면 좋겠는 마음이야 아이나 어른이나 매한가지였겠지만, 어느 아이든 게임을 하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이어달리기에서 패한 것이 분하여 울기라도 하면, 그 자리에 있던 엄마아빠들은 다 내 아이 일인 양 안쓰러웠을 테니까.


잔뜩 준비되었던 상품들이 다 나누어지고 나서야 가을운동회는 막을 내렸다. 마지막에 가족 인원수가 가장 많은 세 가정에 휴지 30롤 상품이 각각 전달되었고, 이어달리기에 온 가족이 참여한 집은 VIP 상품으로 쌀 한 포대를 받았다. 이것이 공평한 시상 아니겠는가.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운동회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원장님은 참여한 모든 가정에게 치킨을 선물해 주셨다. 집에 돌아가 아이에게 밥을 지어 먹일 여력이 없을 부모를 위한 배려의 선물이었다.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내년에도 가을운동회를 또 개최할까요?"라고 물으시는 원장님께 그 자리에 있던 이들은 한치의 머뭇거림 없이 "네!!!!!"라고 대답했다.


운동회가 진행된 두 시간 동안 해가 서서히 져서 우리 모두는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선생님들과도 아이의 친구 부모님들과도 한층 더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으로 말이다. 이미 몸은 땀범벅이었지만, 마음은 그렇게 청량할 수 없었다.


남편과 나는 집에 돌아오면서도, 집에 들어와서도 이번 가을운동회가 얼마나 즐거웠는지에 대해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눴다. 시작은 조이를 위한 참석이었을지 몰라도, 끝은 조이와 우리를 위한 참석이 되었다.


조이를 재운 후 운동회에서 찍었던 사진들을 남편과 꺼내 보았다. 우리 아이 뒤에 찍힌 여러 부모들의 환한 미소를 보니, 내년 가을운동회를 벌써부터 기다리는 건 우리뿐만이 아니겠다 싶었다. 어쩌면 '아이들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우리(학부모)는 이 기회를 틈타 원 없이 소리를 지르고 몸을 흔들어보고 열심히 달리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육아를 하다 보면 놀이의 중심이 아이가 때가 대부분이니까 말이다.


우리 부부에게 이번 가을 운동회는 우리 아이가 가을까지 이만큼 자랐구나를 새삼스럽게 느낄 수 있는 이기도 했고, 우리 아이가 내년엔 저런 모습이겠구나를 그려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원장님과 선생님들을 좀 더 가까이서 만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며, 학부모 간의 동질감과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꼼꼼하고 세심하게 가을운동회를 준비하시느라 고생하셨을, 운동회 후 뒷마무리까지 하시느라 늦게 퇴근하셨을 원장님과 이하 선생님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그리고 '가을운동회'라는 첫 번째 추억이 생긴 너에게, '조이와 함께한 첫 번째 운동회'라는 새로운 추억이 생긴 우리를 위해 이 기록을 남겨본다.


아무래도 나는 가을이 더 좋아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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