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바보 종대 24화

종대가 남겨준 길

당뇨견과 함께 살기 [ 바보종대, 마지막 이야기 ]

by 규아

현관 앞에 서면 늘 심장이 먼저 반응한다. 비밀번호를 누르는 순간, 문 너머의 침묵이 너무 깊다면 어쩌나, 두려움이 엄습한다. 종대가 혹여 혼자 쓰러져 있지는 않을까 하는 공포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러나 문이 열리고 종대가 꼬리를 흔들며 인형을 물고 달려오는 그 순간, 불안은 눈 녹듯 사라진다. “종대야.” 이름을 부르는 찰나, 안도의 한숨과 벅찬 반가움이 한 번에 밀려온다. 종대는 기다렸다는 듯 벌러덩 드러누워 배를 내어준다. 그 천진난만한 몸짓은, 세상 그 무엇보다 따뜻한 마중이다.


종대는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예전의 나는 늘 밖으로 나돌았다. 인정과 성과, 평판에 매달리며 집은 그저 쉬어가는 곳일 뿐이었다. 그러나 종대가 병을 얻고 내가 곁을 지켜야만 했을 때, 집은 더 이상 비워둘 수 없는 자리가 되었다. 낯설던 방 안은 우리의 호흡으로 채워졌고 그 안에서 비로소 집이라는 단어가 지닌 깊이를 알게 되었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래 감쳐두었던 상처들과 마주했다. 아버지의 죽음과 친척들의 냉대, 흰둥이를 지켜주지 못한 죄책감, 이혼 후 봉합되지 못한 상흔, 직장에서의 배신과 소외. 애써 잊으려 했던 것들이 종대의 병마와 나란히 서며 다시 선명해졌다. 그제야 알았다. 상처란 단지 고통이 아니라, 나를 단련시키는 또 다른 힘이었다는 것을.


삶은 언제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품는다. 한때 대형동물병원을 원망했지만, 그곳에서 종대의 당뇨를 알게 되었고, 정확한 진단을 받을 수 있었다. 시간이 흘러야 드러나는 가르침이 숨어있듯이 좋음과 나쁨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인연은 예기치 않은 길로 흘러가며, 그때는 상처였던 것이 훗날 성장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다.


직장에서도 그랬다. 믿었던 이가 내 그림자 뒤에서 결정적 단초를 당기기도 했고, 반대로 원망할 줄 알았던 이가 뜻밖에 손을 내밀기도 했다. 아이러니한 순간들 속에서 절실히 깨달았다. 관계도, 사건도 한쪽 모습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종대의 병이 나를 집으로 불러들였듯, 삶의 굴곡 또한 결국 나를 제 자리로 이끌었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인생의 모든 것은 결국 시절인연이라는 것을. 좋은 인연도 흩어지고, 나쁜 인연도 길을 열어준다. 종대의 죽음을 부정할수록 더 아팠지만, 죽음은 삶의 그림자처럼 늘 곁에 있었다. 움켜쥐려 할수록 놓쳤던 것들, 흘려보내고 나서야 잡히는 것들. 인연은 그렇게, 흐르는 물처럼 변화를 품으면서도 본질은 잃지 않는다.


현관문을 열 때마다 마주하는 종대의 눈빛은 내게 묻는다. 오늘 하루도 잘 지냈냐고. 나는 그 물음에 답한다. “그래, 너로 인해.” 종대와 함께한 시간 덕분에 세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다 잃었다고 좌절했던 일들이 오히려 삶을 채워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이제는 불행도, 언젠가 닥쳐올 이별도 두렵지 않다. 모두가 지나온 시절의 한 조각임을 알기에.


오늘도 나는 종대와 함께 길을 걷는다. 그 아이는 투병과 회복을 거듭하며 내게 잊지 말아야 할 이치를 새겨주었다. 언젠가 발자국이 멈추더라도, 우리의 산책길에는 종대의 잔상이 남아있을 것이다. 그 길 위에서 나는 시련 속에서 얻은 보물들을 되새기며 걸어갈 것이다.


종대와 함께한 시간, 당뇨를 돌보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졌던 날들. 그것으로 충분하다. 삶은 만남과 이별이 어우러진 한 호흡이었다. 차갑지만 동시에 따스한 시절인연. 끝내 남는 것은 단 하나, 함께한 시간 속에 고요히 머문 숨결이다. 그 숨결은 앞으로도 내 삶의 길 위에 잔잔히 이어질 것이다.



종대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만, 여러분 곁에도 또 다른 종대가 늘 함께하길 바랍니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축구 드리블 하는 강아지, 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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