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는 1928년 생이시다.
아마도 살아계셨다면 지금은 아흔을 훌쩍 넘기신 나이가 되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십여 년 전에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아빠가 그랬어.라는 제목은
십육 년 전, 모출판사와 수필집을 내기 위해 작업하던 중 지은 제목이다. 그러나 그때 마침 내가 시나리오 작가로 계약을 하게 되면서
서울로 상경했고, 그 일로 인해 수필집 출판이 흐지부지 되면서 결국 나와 아빠의 스토리는 간간히 sns용으로 올리게 되었다.
나이만으로 보면 아빠는 내게 할아버지 뻘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아빠는 잘생긴 이목구비와 동안 외모로 그 누구도 아빠의 나이를 감지하지 못했었다.
그리고 대구에서 살던 아빠는 군생활의 영향으로 서울말을 쓰셨다.
그래서 친구들은 전화를 하면 들리는 아빠의 서울 억양 때문에 아빠를 멋쟁이라 표현했다.
육군 대위로 이십 년 군생활을 전역하시고
기사를 두고 소리사를 운영해오시다가 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만화방과 복덕방을 하셨다.
대구의 봉덕동 관제탑 앞에서 내 이름은 만화방 둘째 이거나 열 통장 첫째 딸로 통했다.
1973년생 대구에서 태어난 경상도 계집아이인 나.
거기다가 자식복 없는 결혼생활에 재혼까지 해서 아들을 본 집이니. 그 뒤에 태어난 내가 사랑받고 컸을까?
오빠는 귀하게 자란 첫아들이고, 나는 얼떨결에 태어난 못난 둘째 딸. 그리고 내 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산부인과에서부터 미모를 인정받은 막내딸이었으니. 유년시절의 나는 솔직하게 말하면 불행했다.
직업군인이었던 잘생긴 아빠가 전역하고 나서 몇 번의 혼란 속에서 새로 꾸린 가정.
그리고 삼 남매. 우리 집은 그럭저럭 먹고살만했었다. 엄마가 운동회날이면 선생님의 도시락을 싸주셨고
그 당시에는 가치를 몰랐지만 11자짜리 자개농이 있던 나의 집.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 봉덕동의 미제 아주머니가 우리 집에 오는 날이면 냉장고에 아이스크림이란 게 있었고. 뒷물하는 약품과 엄마의 녹색 립스틱도 생겼다. 그리고 아빠는 매일 아침마다 신간이 들어오면 그 당시 호지께스라고 불렀던 지철기 누르는 소리가 타닥타닥 들렸다. 신간 만화책에 비닐 표지를 씌우는 소리였다.
만화방 안에는 당시 유행하던 겔러그 오락기가 있었고, 집 다락방에는 제사 때 쓰는 큰 광주리에 오십 원짜리가 가득했었다. 분꽃. 맨드라미. 해바라기가 일렬로 늘어선 골목 화단 사이로 저녁이면 항상 생선 냄새가 났다.
엄마는 일주일에 한 번 오는 생선장수의 고무 대야에서 간간하게 절여진 갈치와 고등어를 사서 저녁상에 올리곤 했다. 그러니 먹고살만한 집 아니었는가!
그런 우리 집에 위기가 찾아왔다.
엄마가 집을 나갔다.
그리고 우리는 그때부터 가난이 뭔지 알게 되었다.
그때 내 나이 열두 살, 오 학년 때였고 엄마의 부재가 몇 달을 넘어가게 되자 아빠는 농약을 사들고 집으로 오셨다. 그리고 우리 삼 남매를 불러 앉히고 하신 말씀은
"우리 이거 마시고 죽자."였다
사실 나의 기억에는 어렴풋했었는데 훗날 아빠는 그때 죽을 수 없었던 이유가 나 때문이라고 말했다.
내가 그 농약병 뚜껑을 여는 모습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고 했다.
집에 빨간 차압 딱지가 붙고, 그때 우리 집 냉장고는 사라졌다.
그리고 냉장고 대신에 빨간 고무대야가 연탄불 옆에 냉장고 역할을 대신했다.
오뚝이 마아가린 통을 반찬통 삼아 물 위에 둥둥 띄워놓고는 물이 따뜻해지면 다시 물을 퍼내고 수돗물을 받았던 그것이 우리 집 냉장고가 되었다.
11자짜리 되는 자개농도 사라지고. 그저 연탄 이백 장만 있어도 행복했던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가난을 견디며 살아가게 되었다.
아빠가 그랬어.
이 제목으로 글을 올리는 글은 그 시절 아빠와 겪었던 일부터 아빠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나와 나누었던 일상에 관한 이야기이다.
가난했지만 행복했었던 아빠와의 이야기.
누군가 내게 물었다.
누구를 가장 존경하냐고
그때 내가 한 말은 주저 없이 아버지였다.
그래서 나는 나의 모든 작품마다 아빠를 숨겨놓았다.
집도 절도의 할아버지부터, 도서관 가는 길의 아파트 경비원. 상봉장의 복덕방 주인, 육교에서 시를 읊다의 청소부 할아버지, 그리고 나의 최애 작품 [만화방 미숙이]에서 만화방 주인 할아버지.
그게 바로 내 아버지의 또 다른 모습들이었다.
결국 [만화방 미숙이]를 보러 오지 못한 아빠. 그 당시 암투병으로 공연장까지 오지 못했던 아빠를 위해
드라마로 계약하고 아버지 죽기 전에 티브이로 보여드린다고 약속한 것을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는 나.
브런치에 글을 올리면서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때 출판하지 못했던 이 작품을 쓰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나의 파일함에 두고 있었던 아빠와의 추억을 꺼내기로 맘먹었다.
지난 시절. 80년대.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그 기억들 속으로 그대들을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