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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말라 Nov 26. 2021

보호자가 된 딸

일상 이야기(12)

요즘은 내 인생에서 가장 바쁜 날을 보내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브런치의 글 쓰기를 자주 깜박한다.

이 이야기는 보름 전쯤의 일이었다.


한 달 전인가, 대학로에서 친한 선배님과 후배들과의 조우가 있었다.

그때 나는 꽤 오래간만에 가슴통증을 느꼈다.

덜컥 겁이 났다. 스탠스 시술을 받은 지 삼 년이 되었고, 나에게는 심근경색이라는 진단명이 있었지만

약을 끊은 지 이 년이 되었다.  코로나 때문이었다.

대구의 경북대학병원을 다니고 있었던 내가 코로나로 발칵 뒤집혔던 대구를 가기도 그랬고. 그리고 그렇게 약을 안 먹었어도 크게 아픈 것 없기도 했고, 그리고 제일 컸던 것은 그 참에 유병자 보험을 들고 싶기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이 년 동안 약만 끊었던 나, 그러나 담배는 끊지 못했던 나에게 닥쳐질 상황이었다.


결국은 나는 병원으로 향했고, 요즘 병원에서는 입원 검사가 아닌 외래로 모든 검사를 받게 해서인지 일주일에 한두 번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스케줄이 되어 버렸다.

10년 동안 몇 년에 한 번 수술을 받아오는 몸뚱이가 되었지만, 보호자 자격으로 딸을 부른 적이 없었다.

누군가 나에게 병원을 업그레이드할 생각이 없어요?라고 물어봤을 때 나는 서울대 병원이나 삼성의료원으로 

병원을 옮기지 못하는 이유를 말했다.


" 서울에는 보호자가 없어요."

그렇다. 나는 서울에 보호자가 없다.

딸이 있지만 처음 아팠을 때는 애가 중학생이었고, 그리고 그때 당시에 남편은 보호자가 될 자격을 갖추지 못했다. 그리고 딸이 컸을 때는 자격이 되지 못하는 애 아빠와 그리고 직장을 다녀야 하는 딸이었다.

그런데 코로나로 나의 딸 단비는 백수가 되었고 이제는 내가 딸을 보호자로 부를 수가 있었다.


"단비야. 엄마가 아파. 병원에 검사하러 가야 하는데 보호자 동반이라는데 이번에는 네가 내려와 줄 수 있겠니?" 


엄마가 아프다는 말을 들으면 단비가 걱정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그간, 단비를 병원으로 부른 일이 없었던 나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을 몇 년 전에 깨달은 적이 있었다.

늘 나의 보호자를 자청하던 동생이 그때 그 응급실행에서는 아무래도 단비가 와야 할 듯하여 전화를 하여 불렀는데 그때 단비가 한 말이 "이모 나 생리야. 그래서 대구까지 가기 그래"라는 말을 듣고는 괘씸하여 엄청 울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렇다고 딸을 내 보호자로 부르긴 싫었다.

그러나 이번에 마음을 달리 먹은 이유는 바로 전화 때문이었다.

단비는 내가 전화를 하면 두세 시간 안에 리콜을 하지 않는다. 그때마다 나는 단비에게 말했다

"넌 아픈 엄마를 두고 있으면서 왜 나와 이모의 전화에 피드백이 이리 늦어?"


전화기를 끄고 여행을 가기도 하고, 하루 종일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 있어도 답답하지 않은 애다.

그것을 꽤 멋지게 바라보기도 하지만, 서운할 때가 종종 있었다. 

결국 그런 이유로 나는 이번 병원 검사에 단비를 동행시키기로 맘먹었다.


단비가 대구를 온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

단비는 근 칠팔 년 만에 대구를 방문하는 것이다.

혼자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를 간 적은 있어도 혼자 ktx를 타고 지방을 가는 것은 처음인 단비.

이모인 성희도 들뜨고, 엄마도 단비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었다.

대구의 후배들도 단비가 온다는 이야기에 벌써 맛집을 데리고 가기 위해 설레고 있었다.

나 또한 그녀가 나의 보호자 자격으로 온다는 사실보다는 어린 시절 6년간 살았던 엄마의 고향에 놀러 온다는 것 같은 기분으로 그녀를 맞았다.


오자마자 단비를 데리고 막창을 맛 보여 주고, 그녀가 살았던 동네의 바뀐 거리와 건물을 보여주는 스케줄을 잡았다. 그녀의 기억 속에 있는 매운 어묵집을 데리고 가고 그녀가 좋아하는 과일을 사다 놓았다. 

흡사 이건 사 박 오일의 관광투어였지 절대 병원 보호자 코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검사 당일이 되었다. 

검사는 피검사와 운동 후 심전도와 혈압검사. 금식 후 검사 오후는 조형제를 넣은 CT 검사였다.

오랜 병원 경력으로 이게 꼭 보호자를 동반할 정도로 위험한 검사가 아니란 것쯤은 나도 알았다.

다만 병원에서는 보호자 동반을 원했고, 나는 단비를 원했을 뿐이다.

이런 병원행을 통해서 이제 단비는 내가 전화하면 전화를 즉각 받겠지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데 나는 병원 검사를 받기 위해 단비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깜짝 놀랐다.

병원에서 준 종이 설명지는 한글로 적혀 있었지만 알아듣기 힘들었다.

수납 체제와 기다림, 방문부서, 검사, 또 수납 등으로 철차가 까다롭고 건물 찾기도 까다로웠다.

나는 그것들을 차근차근 이해하고 움직였는데 그때마다 단비는 앉아서 톡질을 하고 있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면 애는 의자에 앉아서 딴짓을 하고 내가 불러야만 움직이고 항상 나보다 뒤에서 서성거렸다.


심지어 어떤 검사하는 날에는 아침에 단비를 깨웠는데 늦잠을 자서 나 혼자 병원으로 가기도 했다.

병원을 혼자 차 몰고 가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렇게 며칠의 검사가 끝났고, 마지막 조형제 투여 CT촬영을 마쳤을 때 나는 병원에서의 단비 행동을 보고 화가 났다. 


속이 메쓱거렸다.  촬영을 마치고 나온 나는 단비를 조수석에 태우고 병원을 빠져나갔다.

"단비야. 너 대구 와서 먹고 싶은 게 뭐가 남았지?"

나는 화가 났지만 매우 조용하게 물었다.

"응 엄마 후추 맛이 많이 나는 떡볶이와 찍어먹는 어묵이 생각나"


나는 단비를 데리고 신천시장 할매 떡볶이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동안 금식으로 인해 비어둔 위장에 평소 잘 먹지도 않던 떡볶이를 투척했다.

단비와 나는 게눈 감추듯 떡볶이를 먹고 그 가게를 나와 다시 차에 탔다.

그리고 그때 나는 단비에게 말했다.


"단비야 지금부터 집 도착하는데 30분 걸려. 딱 그 시간 동안만 엄마가 잔소리할게!"

내 목소리 톤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조용했고 차분했다.

그리고 그 조용하고 차분한 톤으로 나는 단비에게 요 며칠 느낀 단비의 단점을 지적했다.


"단비야. 아직은 엄마의 총기가 흐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엄마는 한글을 읽을 수 있고, 그리고 그 문장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남들보다는 빨라. 병원에서 준 종이를 보고 내가 무얼 해야지 빨리 일처리를 하고, 남들보다 덜 기다리고 어디를 가야지 검사를 받는지 알고 있어. 그런데 단비야 너는 엄마가 어떤 병이 가지고 있고, 어떤 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야 하는지  알고 있니?"


그러자 단비는 말이 없었다.

"엄마는 혈관에 문제가 있고 순환기 내과에 가서 진료를 받아. 그리고 스탠스 시술과 관련된 병은 심근경색이야. 그리고 엄마는 당뇨도 있데. 그래서 당뇨는 내분비과 관할이야. 자 너는 나의 병원에 보호자 자격으로 왔어. 엄마는 혈액에 문제가 있기에 언제 심근경색으로 가슴통증을 호소할 수도 있고, 뇌경색으로 반신불수가 될수도 있어. 그리고 그 병들로 인해서 총기가 흐려질지도 몰라. 그럼 그때는 이 종이 쪼가리를 들고 네가 수납하고 뛰어다녀야 해. 네가 중학생일 때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너는 이제 스물네 살이고 넌 이 종이의 말을 이해해야 하고, 너는 나에 대해서 알아야 해. 그렇게 앉아서 친구랑 톡을 할 나이가 아니라고. 내가 먹는 열 알이 되는 약이 어떤 효능이 있는지도 알아야 하고 그 약은 자몽을 먹으면 안 되고, 조형제 넣은 촬영을 할 때는 어떤 성분이 있는 당뇨약 복용을 중단해야 하지도 알아야 하고 그걸 체크하는 게 보호자가 할 일이야. 너는 나의 딸로 온 게 아니라 나의 보호자로 왔어."


단비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중간 중간 응...이라고 말하는 대답에 눈물이 있었다.


나는 최대한 침착하고 낮은 어투로 말을 했다.


어릴 때 나의 부모들이  내가 무얼 사달라고 하면 돈이 없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렇지만 난 단비가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돈이 없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부모가 하면 안 되는 말인 줄 알았다. 내가 어릴 때 그 말을 듣는 게 싫었기 때문이었나 보다.

긴 병과 늘 일정하지 않는 수입 때문에 이삼 년에 한 번씩 돈을 빌리고 계약하면 갚아 나가는

빈곤한 작가의 삶을 단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기에 딸이 자신의 월급을 모아 몇백만 원짜리 타투를 할 때, 내 지갑이 그 애의 지갑보다 가난했던 적이 많았어도 나는 들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요즘의 단비는 직장생활 중 모아둔 돈이 몇푼 남지 않았음에도 제주도 한달 살기를 하고 싶어했고, 

나는 한달동안 진행해야 하는 이 검사비용과 그동안 계약한 작품의 진행이 늦어지기에 언제받을지도 모를

중도금을 포기하고 빨리 병원비라도 마련해야 하는 상황이 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나에게 병도 그런 류였다. 가난처럼 자식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내가 왜 이번에 너를 대구에 불렀겠니. 내가 너를 부른 이유는 이제는 엄마가 전화를 하면

이모가 전화를 하면 전화를 잘 받으라고 부른 거야. 엄마는 나이 서른부터 아빠의 전화벨 소리가 무서웠어.

너희 외할아버지는 남들보다 많이 나이드셨기에 남들이 마흔부터 걱정할 것을 나는 서른부터 걱정했거든.

그런데 너는 엄마가 남들보다 많이 늙진 않았지만 일찍 아프기 때문에..지금부터 걱정해야해. 

엄마 혹은 이모의 전화벨 소리가 잔소리  정도로 치부해서는 안 되는 거야. 알겠지?"


삼십 분의 긴 잔소리 끝에 불쑥 아빠의 얼굴이 튀어 왔다.

십 년간 암투병을 하고 돌아가신 아빠.

아빠의 마지막에 나는 무얼 하고 있었나. 

나도 아빠에게 단비가 아니었나.......

그 순간 아빠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았고, 나는 부끄러웠다.


보호자가 된 다는 것. 

그건 강요해서 되는 일도 아니고

자식이라고 무조건이 되는 일도 아니다.


곧 다시... 나는 대구를 가야 하고 

그리고 지금은 마감과 월말전쟁과 사투를 벌이고 있다.

딸은 가끔 내 지난 과오를 내게 가르쳐 주기에 더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 이야기 끝에 아빠의 얼굴이 떠 올랐을때

나는 단비에게 지금 이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반성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이어나갔다.


집에 도착했을때 엄마가 와 계셨다.

엄마는 훌쩍 커버려 아가씨가 된 단비를 보고 말하셨다.


"아이고 니는 밥안무도 배부르겠다. 우째 저리 컸노!"

그렇게 말하는 엄마한테 나는 볼멘소리를 했다.


"엄마 나는 하난데 엄마는 몇이고! 엄마 니는 그럼 평생 밥 안무도 되겠네!"


망할 기집애 하는 표정으로 나를 째려보는 엄마.

언제나 아빠에게 미안하고 엄마에게 야속했는데....

단비도 그런가?


또 며칠뒤 나는 대구를 가야 한다.

어마무시한 검사비와 월말 전쟁과 함께 마감전쟁을 치르고 있는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늘 살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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