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슬럼프 극복기 (1)
어디부터 이야기할까를 망설이다가 나의 첫 번째 이야기를 마늘장아찌로 시작한 이유는
브런치 작가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전업작가로 20여 년을 살아온 나는 꽤 많은 슬럼프를 겪었다.
그리고 그 슬럼프는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할 정도였다.
인생에서는 세 번째 자살 충동이었고, 그리고 작가로 살면서 맞이 하는 첫 번째 슬럼프였다.
때는, 2011년도 내 나이 서른여덟 살 때였다.
그해에 나는 작가로서 성과가 꽤 좋았을 때다.
한 작품의 영화와 한 작품의 드라마를 의뢰받았다.
우리처럼 목돈이 들어오는 직업은 돈 한번 들어오면 우선 갚아야 할 빚부터 정리했어야 했고
그 해도 어김없이 계약금으로 받은 돈 사천만 원을 들고 빚 청산부터 했다.
그리고 남은 돈 천만 원, 그 천만 원으로 몇 달간 작업을 하고 나면 분명 메이드가 되겠지
생각했었던 철없던 시절이었다.
담배를 피우던 나는 담배냄새가 잘 빠지는 조금 넓은 집을 얻기 위해서 알아보기 시작했다.
대학로는 엄두 내기 힘들 정도로 비쌌고, 미아리, 쌍문동, 의정부, 양주를 알아보다가 결국 동두천 보산동의
구석진 언덕 아래 작은 빌라로 갔다.
32평의 엄청난 평수가 삼백의 삼십오만 원이라는 월세로 나왔기에 별생각 없이 무조건 계약을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계약한 드라마 작업을 위해 몰두했었다.
회사에서는 신인인 나 혼자 작업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을 해서 신인 작가 세명을 엮어서 공동 작업을 하게 했다. 그런데 그중 한 작가는 그 해에 kbs 미니 공모전에 당선이 되었고, 당선작 가는 외부 계약을 할 수 없다는 규칙 때문에 계약을 포기했다. 그 작가는 훗날 [드라마의 제왕]을 쓴 이지효 작가이다.
그래서 결국 다른 작가 한분이랑 내가 공동작업을 하게 되었다. 물론 그때까지 나는 단 한 번도 공동작업을 한 적이 없었다. 십여 편의 연극과 뮤지컬, 영화 작업을 할 때에도 보조작가 조차 쓰지 않았던 내가 공동 작업을 한다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서로의 톤 앤 매너를 맞추는 일도 힘들었고 한 부씩 돌려가며 쓰는 것도 힘들었기에 그 작업이 잘 돌아갈 리 없었다.
결국, 나는 제안을 했다.
"그냥 따로따로 쓰죠. 쓰고 나서 피디님이 골라요. 전 도저히 공동작업을 못하겠어요."
나와 그 작가는 각자 따로 쓴 1회 대본을 피디에게 주었고 피디는 그 대본을 주변에 돌려 심사를 하였다.
피디는 내게 연락이 와서 나의 작품에 대한 반응이 좋다며 좋은 결과를 기다리라고 했었다.
나는 꽤 설레는 마음으로 최종 결과를 기다렸고, 그 작품의 담당 감독으로 내정된 사람은 바로
드라마 [피아노]의 감독인 오종록 감독이었다. 다른 작가와 나는 그 감독을 만나 미팅을 하였다.
처음 만난 오 감독님은 우리 앞에서 웃으면서 말했다.
"작가들에게는 내가 작가들의 무덤이라고 소문났다고 하던데......."로 시작하는 말.
살짝 으스대시면서 하는 그 말이 그렇게 무섭지 않았다.
왜냐하면 같은 경상도 출신이시자 나와 친한 배우 이재용 님과 친한 것으로 알았기에 지연과 인맥에서 내가 좀 더 편할 거라는 오만한 생각. 그 생각은 일주일 뒤에 와르르 무너졌다.
피디님은 최종 결과에서 내가 떨어졌다는 말을 했다.
나는 "왜?"라는 말을 했다.
그러자 피디님은 모니터링 메일을 받았는데 그 메일을 전달해 줄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도저히 납득하지 못했던 나는 모니터링 메일을 내가 직접 봐야만 납득할 수 있겠다고 말했고
그 안에 어떤 욕이 있어도 괜찮으니까 전달해 달라고 했다.
결국, 피디님은 아주 과격한 말을 삭제한 채 내게 전달했었으나, 그 메일을 받은 그날 나는 처음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 밤을 보냈다.
낯 뜨거울 정도로 잔인한 말.
그 작가는 연극만 해야지 드라마에 대해서 이해도가 낮다.라는 말로 시작해서 한 페이지 분량의 읽기 힘든 이야기가 있었고, 그리고 딱 마지막 한 줄에 칭찬 하나가 있었다.
'대사는 잘 쓰더라'
그렇게 그 회사와는 계약이 종료되었고, 그 일로 나는 슬럼프를 겪기 시작했다.
보통 김은숙 작가님의 드라마를 보면서도 나는 자신만만했다.
'그래 저 정도 대사는 나도 쓰지'
그리고 아침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 나는 자신만만했다.
'저런 드라마는 돈 줘도 안 써!'
그런데 슬럼프를 겪는 내 모습은 달랐다.
김은숙 작가님의 드라마를 보면서 생각했다
'로코에 판타지를 넣는 거, 나는 과연 저럴 수 있을까?'
아침 막장 드라마를 보면서도 생각했다
'저걸 내가 안 쓰는 게 아니라 못쓰는 거 아닌가!'
2004년 극작가로 데뷔한 이래, 쓴 작품마다 히트를 치고, 처음 쓴 영화 시나리오로 덜컥 이준익 감독님의 회사와 계약한 나는 무명이란 시절이 없었다. 작가 지망생으로 있었던 시기가 단 하루도 없었던 나에게
그 사건은 엄청난 충격이었다.
서울 상경하면 바로 데뷔할 줄 알았는데, 기껏 쓴 영화 시나리오가 저예산으로 풀리고 처음 계약한 드라마 제작사와는 오 년이란 시간을 허송세월하고 있었고. 기껏 새 작품을 계약했는데 저런 말을 들었으니
나는 이제 작가로서의 삶을 포기해야 하는 가!라는 생각도 했었다.
그런 우울한 하루하루가 지나고,
어느 날 밤 나는 나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나는 왜 불행한가! 나는 언제부터 불행했던 가"
그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가 불행하기 시작했던 것은 바로 초등학교 오 학년 때부터였다.
그날, 엄마와 아빠가 부부싸움을 하면서 우리 집 창고방에 있던 장아찌 병들이 깨어지고, 동치미가 든 장독이 깨어지던 그날이었다.
엄마는 그날 집을 나갔고, 엄마의 가출 후에 알게 된 것은 엄마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빚을 졌다는 것
그때부터 우리 집은 결손가정이 되었고, 아버지는 홀아비가 되었고 우리는 영세민이 되었다.
그 이후로 우리 집 밥상에는 장아찌와 동치미가 올라오지 않았다.
요즘 내가 잘하는 말이 있다.
누군가가 김장을 한다 라고 하면 "너네 집 부자구나!"라고 말한다.
이유는 일 년 치 먹거리를 장만하는 것도 어느 정도 살아야지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나는 그때 깨달았다.
일 년에 백 포기의 김치와 동치미, 각종 담금주, 장아찌를 담던 우리 집은 그때 사라졌다.
엄마의 부재와 함께 전월세를 전전하면서 이사를 하였고, 마당이 없는 집에 세 들어 살면서 한 달 벌어 한 달을 살아야 하는....... 엄마는 가고 가난이 왔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내가 딸아이를 낳고 작가가 되었어도
나는 가난했고, 나는 늘 별거 상태의 삶을 살았기에 나 또한 장아찌를 담거나 김장을 담을 능력이 되지 않았다.
2011년 그해... 오월
나는 자살을 결심했다.
자살을 하기 직전에 내 통장에는 이백만 원의 돈이 있었고
죽기 전에 무엇을 할까 맘먹었던 나는
마늘장아찌를 담기로 했다.
이 이야기를 해줄 때마다
이 슬픈 이야기의 첫 웃음은 바로 이 대목에서 터졌다.
죽으려고 하던 년이 마늘장아찌를 담겠다고 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