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방문은 항상 우리를 분주함 속으로 몰고 간다.
아이의 생일을 맞이하여 부모님의 방문은 전투적인 대청소의 분주함을 선물로 준다.
미루고 미루던 음식물 쓰레기 버리기와 쌓여있는 설거지거리를 정리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이와의 시간이 줄어든다.
우리 아이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좋은 어른이자, 즐거운 놀이 상대다.
주말 내내 놀아줘도 아이는 '오늘 아빠랑 많이 못 놀았어'라며 울며 잠들기 마련이다.
오늘도 열심히 주방 정리를 하던 내 뒤에서 가위 자르기 대결을 하자며 아이는 출사표를 던진다.
알겠다며 준비하고 있으라는 말을 던지고 더 빠른 속도록 설거지와 뒷정리를 한다.
뒤에서는 '나 한 개 다 잘랐다', '나 이제 두 개 자른다', '어허 나 세 개 벌써 잘랐다. 얼른 와서 잘라보시지'라는 도전적인 말들이 귀를 때린다.
하지만 전투적인 정리를 마친 나는 빠르게 씻고 나오겠다며 후다닥 화장실로 들어가서 씻는다.
그러나 그의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유치원에서 체육을 하고 온 금요일 저녁, 극도의 피로감이 이미 그를 지배하고 있었기에 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린다.
"아빠 금방 씻고 나갈게!" 라며 아이를 다독였지만, 마음 한편에는 '왜 잠깐을 못 기다리나.. 내가 놀고 있던 것도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하지만 눈물을 흘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니, 설거지하는 내 뒤에서 출사표를 던지고 빠르게 가위질을 하던 아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빠와 함께 자르기 위해 기다리고 기다리다 금방 간다는 말에 먼저 시작한 아이의 눈에는 계속 줄어드는 오징어만 보였을 것이다.
이제 아빠가 자를 수 있는 오징어가 두 마리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그마저도 아빠가 씻으러 들어가는 바람에 한 마리 밖에 남지 않은 오징어를 보며, 아이는 생각했을 것이다.
'아빠가 자를 오징어가 이제 한 마리밖에 안 남았는데... 왜 아직도 오지 않는 거야.'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수건으로 대충 흐르는 물을 닦고 나와 아이를 안아주었다.
내 생각이 맞았다.
아빠가 자를 수 있는 오징어가 고작 한 마리였기에, 아이는 자기가 이겼지만, 이겼음에도 아빠와 더 이상 같이 자를 오징어가 없었기에, 그게 너무 아쉬웠던 것이다.
"아빠가 너무 늦게 와서 아쉬웠어"라는 아이의 말은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아이의 눈물에는 기다림도 있고, 나름의 이해도 있고, 그 끝에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는 그것을 '떼'라는 짧은 단어로 정의하기도 하지만, 한 번쯤은 '아쉬움'이라는 깊은 단어로 정의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