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의 교통사고가 나기 전까지 수십번 혹은 수백번의 전조현상이 있다고 한다.
아마 비보호 좌회전에서 신호를 무시하던 것을 몸이 기억하고 있었다거나, 나도 모르게 부앙하고 밟아버리는 과속의 습관이 그 한번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논리이다.
생각해보면, 아이와 나는 꽤나 빈번하게 전조에 노출되어 있었고, 여전히 그 일상 가운데 있지만 이제는 더 이상 갈 데없이 그간 묵혀둔 체증들이 뻥뻥 터지는 것이 아닐까라는 추측에 도달했다.
지금 길을 걸아가는 사람들도 실은 미친사람일지 모른다는 말에 동조하는 사람으로서, 아이와 나는 어쩌면 굳이 비정상과 정상을 가르는 기준이 있다면 비정상에 가까운 쪽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런데, 이 비정상도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노출되는 환경에 따라 가름이 지어지는 경우 자신이 정상이었던 때조차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놀란다.
아이가 네살에 건너온 미국은 낯설었다.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생각은 감히 꿈꾸지도 못하고 어떻게든 하루가 지나가는 데에만 안도하고 살았다. 마지막으로 문닫고 들어간 대학원에서 제발 졸업만 시켜달라고 통사정을 하며 다시 문닫고 학교를
떠나는 단 그 한순간도 순탄하지는 않았다. 정말 급할 때에는 아이를 안고 수업에 들어갔을 때도 있었으니 나는 쪽팔림도 모르는 사람이라는 걸 그 때 알았다.
어쩌다 눈을 떠보니, 미국에서의 처음 직장에서도 아이와 나 둘뿐이었다.
한글도 못 뗀 아이에게 우주에 뚝 하니 떨어진 자신을 덩그러니 두고 총총 일터로 향하는 엄마는 어쩌면 동거인에 가까웠을지도 모르겠다.
삶의 터전을 마련하는 것부터, 취업, 그리고 직장생활, 아이의 교육환경마련 살림까지 혼자하기에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십년가까이, 나는 아이를 위하는 척하며 나만 생각하는 삶을 생각하는 하루를 모아왔다고 하는 것이 맞을 것 같다.
아이의 입에 밥수저를 넣어주는 순간에도 나는 옆에 없었다.
'엄마 제발 여기 옆에 좀 앉아바바' 를 아직도 듣는데 나는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요리를 하고 나서도 다음날 아침 점심을 준비하는 나는 서서 한끼를 해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언제 부터인가 아이는 나에게 장난을 치지 않았다.
나는 아이가 나에게 길들여져 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비상연락망 하나 없이 죽기 살기로 버텨온 직장은 나름 잘되어 더 나은 이직을 했고, 수십번의 이사를 걸쳐 내 집까지 마련했지만 내 앞에는 가죽만 덩그러니 남은 아이의 공허한 눈빛이었다.
중간 중간에 교통사고도 있었고, 경찰이 집으로 찾아온 날도 있었으며, 아이와 함께 법원 출두한 적도 있었다. 가끔 끝나지 않은 일에 주말에 아이와 함께 출근했던 적은 자주 있었고, 아파서 쓰러져 가는 아이를 도저히 데릴러 갈 수 없었던 적도 있었으나 그 마저도 버틸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차피 삶이라는 것이 그다지 친절하지 않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알고 있었기에, 굳이 기대거나 기대하지 않고 이제껏 증명해 온 각자의 삶의 방식에 성실함을 더 할 뿐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실 나에게만 그저 버틸만한 강도였을 뿐 아직 세상의 문턱에서 발도 들이지 않는 야리야리한 아이에게는 벼락맞는 상황이었던 듯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엄마를 좋아한다 사랑한다'며 서슴없이 양손 벌리고 '안아주구가'를 말하는 아이는 그 동안 불안한 내 뒷모습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오늘에서야 궁금한 이유는 뭘까.
항상 아이가 함께라서 혼자는 아니었지만, 어른 혼자서라도 감당하기 벅찬 던 건 사실이라 스스로에게 연민을 좀 자주 종종 느끼는 편이었는데 그래서인지 징징거리는 것도 수준급이다. 아마도 그 사이에서 아이는 엄마라는 사람을 이미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지했을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들어버린 철이 사실은 아이는 부정하고 싶은 현실이었을수도 있다.
엄마가 공부하고 있을 때에는 조용히 해야하니까 머리에 해드폰을 끼고 책상 밑에서 찍소리 하지 않고 넷플릭스를 남김없이 보고, 주중에는 밤에도 타닥거리며 일하는 엄마 뒤에서 '언제 재워줄꺼야'를 하품과 함께 쏙하니 먹어버린 아이. 주말에도 바쁜 엄마 옆에서 기지개 한번 편하게 못 편 아이라 자기의 안위보다는 불편함을 먼저 알아버린지도 모르겠다.
요즘 우리 둘에게는 자기 직전에 서로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눈싸움을 하는데 아이가 하는 희한한 소리가 하나 있다. '엄마 응애'이다.
키는 거의 내 머리까지 와서 이마에는 여드름이 성성한 놈이 응애라니.
그래도 가슴팍을 파고들며 응석을 부리는 것 처럼 마음에 안드는 일이 있었거나 답답한 일이 있으면 그대로 달려와 '응애'를 외치는 아이의 등을 쓸어 내려 본다. 그 때 했어야 했던 걸 못해 이제야 하는구나 심정으로 듣고 있으면 어쩌면 아이의 뇌전증도 그 '응애'와 같은 버전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이가 좋아하는 가수 중에 AJR이라는 그룹이 있다. 그들이 부른 곡 중에 참 좋아하는 노래가 하나 있는데 '100 bad days' 라는 곡이다.
"
A hundred bad days made a huderad good stories
A hundred good stories make me interesting at parties
A hundred bad days made a hundred good stories
Yeeah no I ain't scared of you
No, I'aint scard of you no more
100개의 안 좋은 날은 100개의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주고
100개의 모험담은 날 흥미로운 사람으로 만들지
100개의 안 좋던 날들이 100개의 모험담이 되었어.
난 네가 두렵지 않아
네가 더 이상 두렵지 않아
"
우리는 차 안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뇌전증은 똑똑해서 오는 것 같다며 나폴레옹의 전기를 읽고 감동해 마지 않은 아이는 잘하고 싶은 것이 많다. 때문에 주말에는 온통 라이드 일정으로 가득 차 있는데, 그래서인지 차에서 먹고 마시고 놀다가 시간이 되면 학원으로 퐁당 뛰어 들어간다.
이 때 이 노래가 나오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목청껏 따라 부르는데, 아마 우리는 누가 서로 설명해 주지 않아도 앞으로의 험난한 100일을 100개의 모험담으로 만드는데 함께 해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서일지도 모르겠다.
언젠가는 꼭 잡았던 두 손을 떼고 각자의 모험담을 찾아 헤어지겠지만.
지금 우리는 둘이 함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