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그 답을 줄 것인가
우리 인간은 누구나 매우 본질적이지만 그 답을 찾기 무척 힘든 질문 하나를 평생 동안 품고 살아가고 있다.
그 질문이 바로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일까?'이다.
그런데 이 질문은 '나는 왜 태어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것과는 달리 매우 은밀해서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 거의 없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자각하는 것도, 제삼자에 의해 타의적으로 인식되는 것도 쉽지 않은 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끝없이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얻으려 애쓴다. 하지만 당연하게도 의식적으로 던져진 질문이 아니기에 답을 찾았는지 조차 스스로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이 질문을 품은 이유는 단순하다. 오래 건강하게 잘 살고 싶어서 그렇다. 내 삶을 최대치로 누리고 싶어서 그렇다. 이것은 마치 시험 답안지를 한 칸씩 밀려 쓸 수도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일종의 두려움이다. 매일 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는데 만약에 엉뚱한 착각을 했거나, 커다란 실수를 하고 있었거나, 누군가에게 완전히 속았거나, 아예 목표 자체를 잘못 정했거나 했다면 얼마나 두려운 일일까?
그래서 우리는 계속 자신이 그런 착각이나 실수 없이 잘 사고 있었는지 지속적으로 확인하고 싶어 한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까? 도대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내가 잘 살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사실 이 부분이 가장 큰 문제이다. 우리는 각자가 잘 살고 있는지를 알길 바라지만 그것을 알 수 있는 방법이 막막하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타인과의 비교'이다.
우리가 자꾸 불필요할 정도로 타인과 우리 자신을 비교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달리 내가 너보다 잘났는지 알고 싶은 게 아니라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서 자꾸 비교를 하고 있다. 그래서 상대가 나보다 뭔가 더 잘 살고 있는 것 같으면 두려움을 느끼고 반대로 상대가 나보다 못 살고 있는 것 같으면 안도감을 느낀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도 잘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비교 후 단순히 부러움으로 끝날 일을 참을 수 없는 질투로 확대시키고 그저 안도감만 느끼고 말 일을 내가 잘났다는 우월감으로 변형시키고 만다.
딱히 생존에 관련되지 않은, 그래서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닌 것들조차도 그저 상대가 나보다 잘 살고 있는 듯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상대를 질투하고 그렇지 못한 나에 대한 자괴감을 느낀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내가 잘 살고 있지 못한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을 품게 되어서 그렇다. 그뿐이 아니라 과거로부터 '내가 잘못 살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과 계속 '잘 살지 못하는 게 아닐까?'라는 걱정으로 이어져서 더욱더 큰 두려움에 휩싸인다.
우리는 그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반대로 만족감을 얻고 싶기에 언제나 '타인의 좋은 평가'를 원한다. 그래서 음식 사진을 찍고, 여행을 가면 여행지 사진을 찍고, 예쁜 카페 사진을 찍고,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찍어서 사람들에게 알린다. 내가 잘 사고 있음을 주변에 알리는 것이다.
이런 행위는 단순히 생각하면 자신의 행복을 자랑하는 듯 보이지만, 사실 그 이면엔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이 맞지?'에 대한 근본적인 동의를 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누군가 '좋아요'라고 해주면 그때 비로소 안도감이 느껴진다. 그런 타인의 '좋아요'의 반응이 바로 '내가 잘 살고 있음에 대한' 답이 된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타인의 사진에 '좋아요'를 누를 때, 우리는 정말로 그들이 잘 살고 있다고 생각해서 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 그냥 좋아 보이고, 예전부터 해왔고, 그렇게 해줘야 나중에 나에게도 해주기 때문에 한 것이다. 우린 모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저 서로 외면한다.
다른 사람들의 '좋아요'는 잠시 기분을 좋게 해 주지만 금세 그 약효가 떨어지고 만다. 그 반응은 결코 '내가 잘 살고 있음'에 대한 답이 되어 주질 못한다. 그래서 우리는 또다시 '좋아요'를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뭔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다들 딱히 필요하지도, 아니 오히려 내 행복에 방해가 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반복적으로 내 사생활을 알리고 타인의 사생활을 보는 일에 그리 열심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심리를 파고든 것들이 바로 다양한 형태의 SNS 서비스이다.
특히 인터넷으로 연결된 '얼마나 잘 살고 있는지' 평가 시스템은 예전엔 아는 친구나 친척, 직장 동료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나가는 동창모임 정도에서나 받았던 평가범위가 거의 전 지구적인 범위로 확장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로 인해서 우리는 무척 힘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인터넷에는 너무도 잘난 사람들이 많아서 예전과 달리 '좋아요'를 몇 개 받았다고 만족스럽지 못하다. 거기엔 수십 수백만 번의 '좋아요'를 받는 사람들이 넘쳐나서 내가 받은 몇 번의 '좋아요'는 상대적으로 무척 초라해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이제 사진을 좀 더 잘 찍고 싶어 한다. '잘 살고 있음'을 평가받고 싶다는 목적이 이제는 최대한 많은 '좋아요'를 받기 위한 목적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각도를 따지고, 번쩍 뛰기도 하고, 평소보다 훨씬 더 즐거운 표정을 짓고, 최대한 멋지게 찍으려고 노력한다.
그런 노력 끝에 순간적이지만 마음에 쏙 들게 나오면 그리 기분이 좋다. 그렇게 각자의 삶은 잘 포장되고 멋지게 편집된 모습으로 타인에게 노출된다. 그리고는 그 모습을 서로 바라보면서 조금씩 불안해진다.
그저 처음엔 내가 잘 살고 있는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누가 더 잘 살고 있는지를 경쟁 속에 놓이게 되었다. 심지어 대다수는 패자가 되었다.
이 문제를 피하거나 해결할 방법은 없을까? 뭐,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쉽지 않을 뿐이다.
제일 먼저 할 일은 우리가 매일 보는 타인의 사생활은 그들이 '나 잘 살고 있는 것 맞나요?'라고 하는 질문임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비싸고 흔치 않은 경험이라도 결국 같은 것을 원하고 있다.
아무리 부자라도, 아무리 강한 권력을 가졌어도,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아무리 재주가 좋아도, 아무리 예뻐도, 아무리 잘 생겨도, 아무리 멋진 몸매를 가졌어도,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아무리 그림을 잘 그려도, 아무리 악기를 잘 다뤄도,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결국 그런 장점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공개되는 이유는 하나뿐이다.
나 잘 살고 있는 것 맞죠?, 이 질문에 대한 인정과 관심을 원하는 것이다. 아니면 돈을 벌 목적이거나.
그러니 그 질문을 던지는 그들과 그 질문에 평생 시달리고 살아가고 있는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연민을 느껴야 한다. 생각해 보면 얼마나 안쓰러운가? 결국 언제가 죽을 삶이기에, 그것이 그토록 두려워서 평생 동안 그런 답도 내질 못할 질문을 붙잡고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더해서 타인에게 '너 잘 살고 있어'라는 한마디를 들으려고 그토록 노력하고 있다.
당연히 나 자신도 그런 행위를 멈추야 한다. 내가 누군가에게 내가 잘 살고 있는 모습을 공개할 때 기분은 좋을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원하던 답을 얻을 수는 없는 행위이다. 처음부터 내가 잘 살고 있는지를 타인이 답을 내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내가 잘 살고 있는 것은 오직 나 자신만이 답을 낼 수 있다.
그 답은 오직 자기 확신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내가 잘 살고 있는지는 나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타인의 평가에서 시선을 떼고 나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고 있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그저 내가 그 답을 듣는 것이 두려운 것뿐이다.
내 답안지를 밀려 썼는지 여부는 내 답안지를 똑바로 쳐다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도 자꾸 타인의 답안지와 내 답안지를 비교하면서 확인하려 든다. 만약 그 사람도 밀려 썼으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다른 것은 몰라도 이것만큼은 꼭 기억해야 할 것이다. 누군가 자신의 잘 살고 있음을 남들에게 자랑하고 있다면, 그 말은 역으로 그 사람은 자신이 잘 살고 있음에 대한 끝없는 의심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자신이 충분히 잘 살고 있다면 힘들게 사진 찍고 어딘가 올리고 평가받는 행위를 할 필요가 없다. 그건 생각보다 몹시 귀찮은 짓이다.
물론 사람들과의 적당한 교류를 위해서 SNS를 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다.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 관계는 매우 중요한 것이니까. 그래서 잘 생각해 봐야 한다. 도대체 나는 거기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나는 왜 나의 사생활을 타인에게 알리고, 또 나는 왜 타인의 사생활을 바라보고 있는가?
별 문제없다면 별 문제없는 것이다. 하지만 별 문제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 처음에는 별 문제없었더라도 결국 생겨 버리고 만다. 너무도 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보고 있다 보면 별 문제없던 내가 잘 못 살고 있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해외여행 안 가도, 맛집 안 찾아다녀도, 그 제품 안 사도, 그런 취미 없어도, 그런 사람들 못 만나도, 그런 가족 없어도, 그런 이벤트 없어도, 그런 집에 못 살아도, 그런 직장 못 다녀도 내가 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우리가 유한한 삶을 사는 생명체로써 잘 살고 있음의 여부에 대한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는 질문이다. 그러니 그냥 품고 살아가면 된다. 그런가 보다 하면 된다. 너무 과도하게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