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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크팍 Nov 28. 2023

나의 수습일지 #재난 현장에는 내가 있다(3)

평화로운 재난 취재?

폭우 피해 첫 취재가 시작된 날 혜화경찰서로 출근했다. 선배는 마와리 대신 라인 내 피해 상황을 파악하라고 지시했다. 실제 저녁 메인뉴스에 쓰일 수 있기 때문에 영상 제공이 가능한지도 함께 확인해야 했다. 당시 혜화북부라인은 경기북부까지 관할하고 있었기 때문에 확인해야 하는 곳이 많았다. 각 소방서와 소방재난본부, 지자체까지 일일이 전화를 돌려야 했다.


주로 한강 이남권에 집중호우가 내렸기 때문에 경기북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서울 북부권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비가 쏟아진 다음에 약해진 지반으로 인한 피해도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점심 전까지는 계속해서 피해 상황을 파악했다.


함께 혜북라인에 있던 국제부 장 기자에게는 빈소 취재 지시가 떨어졌다. 신림동 세 모녀의 빈소였다. 이날부터 장 기자는 각종 사건사고가 터지면 빈소 취재를 도맡아 했다. 개인적으로는 빈소 취재가 가장 어렵고 하기 싫었다. 안 그래도 힘든 유가족들을 찾아가 기삿거리가 될 만한 이야기는 없는지 캐묻고 따라붙어야 했기 때문이다.


처음 빈소 취재에 나서는 장 기자에게 캡은 절대 무리하지 말라고 했다. 섣불리 유가족에게 다가가지 말고 멀찍이서 지켜보라고만 하셨다. 기자들이 우르르 몰리는 상황이 벌어지면 그때 같이 취재에 나서도 된다고 하셨다. 유가족 취재가 정말 어렵다며 수습기자들에게 나름의 가이드라인을 주신 것이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라인 내 특별한 피해가 없다며 선배는 마와리를 돌라고 했다. 피해가 큰 강남라인과 영등포라인 동기들은 분주하게 피해 지역들을 다니며 취재를 하는데 혼자 마와리를 돌아도 되는 것인지 의아했다.


마와리를 돌다가 흡연장에서 경찰로 보이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명함을 내밀었더니 본인은 KBS 기자라고 했다. 혜화서에 기자실이 있다 보니 경찰이 아닐 수도 있었는데 미처 생각을 하지 못했다. K 기자님은 폭우 때문에 다들 현장에 나가있는데 왜 경찰서에 있느냐고 물었다. 왜 KBS에 안 오고 MBN을 갔느냐고도 물었다. 아쉽게도 KBS는 서류전형에 합격해 본 적이 없었다. 기자님은 KBS도 인력이 부족하다며 하소연을 했다. 배부른 소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두 시간 마와리를 돌고 보고하니 선배에게 새로운 지시를 받았다. SNS에서 전날 강남역 침수 피해 상황이 담긴 영상을 확보하라고 했다. 강남지역 피해가 컸다 보니 저녁 뉴스도 이쪽에 집중하는가 싶었다. 강남 한복판에서 폭우로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져 사망자가 발생했으니 그럴만했다.


실제로 방송 뉴스에서는 SNS 영상을 자주 활용한다. 보통 사건이나 사고가 발생하면 기자들은 소식을 듣고 뒤늦게 현장을 찾는다. 발생 당시 영상을 직접 확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하지만 SNS에는 시민들이 사건사고 당시 생생한 영상들을 올린다. 이런 영상을 촬영자의 동의를 받아 뉴스에 사용하게 된다. SNS을 통해 취재하는 방식은 이후 이태원 참사나 각종 사건사고 취재에서도 활용했다.


※ 당시 SNS를 통해 사용 허락을 받았던 영상들입니다.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어느 정도 영상 확보가 끝나자 퇴근 지시가 내려졌다. 강남, 영등포라인 동기들은 여전히 피해 현장에 있었고 중부라인 동기들도 현장 취재 지원에 나갔다. 같은 라인 장 기자도 여전히 빈소에 있었다. 동기들 중 거의 유일하게 제시간에 퇴근을 했다.


퇴근길 집 근처 지하철역에 내리니 침수 피해로 엘리베이터 운행이 중단되어 있었다. 이수역만큼은 아니지만 이곳도 침수피해가 있던 것이었다. 언제 취재에 나서야 할지 모르니 주변을 돌며 피해 상황을 확인하고 사진을 찍었다. (퇴근한 뒤였다.) 침수로 한 상가건물은 통째로 정전이 되어 가게들이 전부 문을 닫았고, 지하철 출입구 쪽 인도는 일부가 유실되어 있었다.



다음날에도 마와리를 도는 평화(?)를 누릴 수 있었다. 중부라인 동기 한 명도 라인 내 피해가 크지 않아 마와리를 돌았는데 이래도 되는 것이냐며 서로 의아해했다. 국제부 장 기자와는 중랑서 과장님 한 분과 점심 약속이 있어 함께 약속에 가기도 했다.


중부라인에 있던 다른 동기 전국부 장 기자는 이날 강남 취재지원을 나갔다가 힘들다며 연락이 왔다. 타사에 비해 현장 취재 환경이 너무 열악하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결국 일찍 퇴근한 나는 장 기자가 있는 곳으로 가 함께 저녁을 마시며 술을 한잔했다. 그렇게 폭우 취재는 마무리가 되어 갔다.


다른 동기들에 비해 다소 평화로운 재난을 겪었다. 그래도 이때 경험은 이후 태풍이나 이태원 참사 같은 재난 상황에서 적절히 대응하고 취재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했다. 역시 기자는 겪으며 성장한다.


https://blog.naver.com/chicpark_/223277215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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