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취해도 기억하고 일해야 하는 사람
태풍은 생각보다 조용히 지나갔다. 서울 한정이었다. 남부지역에서는 태풍으로 인해 지하주차장이 잠기고 곳곳이 침수되는 피해가 있었다. 상황이 좋지 않아 지방으로 출장을 갔던 동기는 한동안 올라오지 못하고 계속해서 피해 취재를 이어갔다.
회사 차량 한 대도 침수되었다. 방송기자는 현장에 나갈 때 4인 1조로 움직인다. 취재기자와 촬영기자, 오디오맨, 차량 형님이 한 차량에 탑승한다. 태풍에 대비해 여러 차량이 피해가 예상되는 남부지역에 내려갔다. 그중 따끈한 새 차가 인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침수된 것이다.
서울에 남은 나는 태풍과 무관한 일정을 소화해 갔다. 당시 김건희 여사의 논문 표절이 이슈였는데 숙명여대에서 표절 본 조사를 위한 연구윤리위원회 개최를 촉구하는 서명전이 진행됐다. 지시를 받고 현장에 갔는데 마침 촬영기자 동기와 함께 일정을 챙기게 됐다. 태풍이 지나간 뒤라 기분 좋은 청명한 날씨였다. 기사도 내가 쓰지 않았고 동기와 함께 현장 스케치와 인터뷰만 챙기면 됐다. 즐겁게 일정을 마치고 라인에 복귀했다.
다시 평소처럼 마와리를 돌고 있는데 메일이 한 통 왔다. 입봉 기사에 대한 항의였다. 이미 한차례 크게 항의를 겪어봤기 때문에 이제는 대수롭지 않았다. 뼈 선배에게 메일 내용을 보고했고, 선배는 캡께 보고할 테니 그냥 두라고 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없으니 개의치 말라고도 했다. 보고를 받은 캡도 기자 생활하면서 이런 일은 평생 안고 가야 할 숙제라며 확인만 잘하자고 하셨다. 무언가 일을 겪을 때마다 굳은살이 박이는 것 같았다.
이날은 경찰 취재원이자 대학 동기와의 저녁 자리가 있는 날이었다. 계속해서 경찰과 식사나 술 약속을 잡으라는 선배의 지시에 대학 동기 찬스를 썼던 것이다. 학교를 다닐 때는 자주 어울리며 술도 마시곤 했는데 졸업 후엔 별다른 연락을 못하고 지냈었다. 동기는 시험을 준비하고, 나는 대학원을 거쳐 취업 준비를 했었기에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랜만에 연락한 게 기자가 된 이후였다. 작년에 대학 선배이자 같은 회사 기자 선배였던 김 선배와 술자리를 한 적이 있다. 복지부를 출입하던 당시 알게 된 취재원이었는데 김 선배와의 인연도 깊었다. 취재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선배는 취재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선배는 말했다.
“생각나면 언제든 전화할 수 있는 게 기자지.”
맞는 말이었다. 누구든, 언제든 연락하고 만날 수 있어야 하는 직업이다. 물론 최소한의 예의는 갖춰야 하지만, 너무 예의만 차려서는 무언가를 얻기 힘든 직업 같다. 나도 그렇게 대학 동기를 찾았다. 경찰과의 약속을 잡으라는 압박에서 벗어나려다 대학 동기가 생각났고 바로 연락했다.
동기와 조금은 이른 시간부터 만나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만났지만 어색하지 않았다. 너무나 반가웠고, 선배의 압박에서 벗어나게 해 준 동기가 고마웠다. 그렇게 오랜만에 회포를 풀다 보니 시간은 훌쩍 지났고 우리는 만취했다.
만취한 와중에 사랑제일교회 측에서 연락이 왔다. 선배 지시로 타사 보도 내용 확인이 필요했는데 메시지로 남겼던 콜백이 저녁 늦게야 온 것이다. 동기에게 양해를 구하고 통화를 한 뒤 노트북을 꺼내 뼈 선배에게 내용을 보고했다. 점심이든 저녁이든 식사 중에 노트북을 꺼내 들고 잠시 일하는 모습은 기자들에게 흔한 일이었다.
과음을 한 덕에 다음날 보고 내용을 제대로 정리하지 못했다. 동기였지만 경찰이자 취재원이었기에 식사 자리에서 오간 대화 내용을 정리하고 정보보고 하나는 의무적으로 선배에게 보고해야 했다. 우선 정리된 내용만 일보에 올린 뒤 선배에게 양해를 구해 5분의 시간을 더 얻었다.
5분이라는 시간은 정말 짧았다. 만취한 상태에서 오고 간 대화 그리고 숙취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에서 대화 내용과 정보보고를 전부 정리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몇 줄 적지 못한 채로 다시 보고했다. 선배에게 깨질게 뻔해 보였다.
선배는 식사를 몇 시간 했느냐고 물었다. 식사했던 시간을 말하고 나는 내용을 더 보완하겠노라고 선수를 쳤다. 선배는 다른 동기가 술자리를 복기한 내용이라며 최소한 그 정도는 채우라고 했다. 선배가 지시한 일들을 소화하며 틈틈이 술자리 복기도 채워 간신히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마와리를 돌 틈도 없이 기자회견을 챙기라는 지시를 받았다. 시간도 촉박했다. 당시 경찰국 신설과 임명된 국장에 대한 논란이 일었는데, 김순호 국장 관련 녹화공작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이었다. 숙취로 힘든 와중에 마와리를 돌기보다 기자회견 일정을 챙기는 것이 훨씬 좋았다. 쾌재를 부르며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프레스센터로 향했다.
여담으로 이날 회견에서 옆자리에 앉았던 타사 박 기자님과 인사를 나눴었는데 이번에 내가 회사에서 기획한 연수에 강사로 오시게 됐다. 사람 인연은 정말 어찌 될지 모른다.
기자회견 일정을 마치고 라인에 복귀했다. 일정도 하나 소화했으니 적당히 마와리를 돌다가 퇴근해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점심을 먹고 뼈 선배에게 보고하니 바이스에게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총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