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폭우와 트라우마
오타로 진땀을 뺀 기사가 나가고 다음날. 오후조로 출근하는 주간이었다. 몇몇 동기들이 태풍 때문에 지방 출장에 동원이 되었고 같은 라인 동기도 포함됐다.
뼈 선배에게 일요일 저녁에 연락이 왔다. 출장 인원 때문에 오전조로 출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출장자들이 언제 복귀할지 모르기 때문에 한 주를 통째로 오전 조 근무를 하게 됐다. 개인적으로 오전 조를 싫어했다. 집시표와 라인 내 일정을 정리해서 일보를 올려야 하기 때문에 손이 많이 갔다.
뼈 선배는 출장은 아니었지만 나도 마와리 대신 다른 근무를 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언제 지시를 받고 이동할지 모르니 12시까지 자유롭게 마와리를 돌라고 했다. 11시쯤 뼈 선배는 마와리를 끝내고 남성 사계시장으로 이동하라고 지시했다. 지난 8월 폭우 당시 침수로 인해 피해가 컸던 곳이었다. 선배는 상인들에게 이번 태풍으로 인한 피해가 걱정되지 않는지 상인 인터뷰를 섭외해 보고 섭외가 안 되는 상황을 대비해 밑대기도 확보하라고 했다.
이수역에서 내리니 아침보다 빗줄기가 굵어졌다. 8월 폭우 때 구두 하나를 해 먹었다. 이번엔 구두를 지켜내야 했다. 인터뷰이 섭외를 위해 시장에 들어갔는데 마침 신발가게가 있었다. 구두를 지키기 위해 장화를 사서 신발을 갈아 신었다. 사장님은 인터뷰 요청을 거절하시며 상인회장을 찾아가 보라고 했다.
상인회장을 만나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이번에도 거절당했다. 다른 가게들을 돌아다닐 수밖에 없었다. 시장 곳곳에는 아직도 침수피해가 방치된 곳들이 있었다. 근처로 가면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밑대기를 확보하고 인터뷰를 요청하고 있는데 뼈 선배에게 다른 지시가 내려왔다. 지난 폭우 때 신림동 세 모녀가 사망했던 동네로 이동해 반지하 촬영 가능한 곳을 섭외해 보라고 했다. 이동하며 혹시 몰라 정육점에 들렀다. 사장님은 흔쾌히 인터뷰를 해주시겠다고 했다. 지난 폭우 때 가게에 허리 높이까지 물이 차올라 피해가 컸는데 지금도 상인들이 특별히 대비할 수 있는 게 없다며 하소연을 하셨다.
현장에 도착하니 MBC 취재진이 있었다. 세 모녀가 돌아가신 빌라 외관을 촬영하고 있었다. MBC 김 기자님과 인사를 나누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수습이라고 하니 본인이 인근 동네를 다 돌아봤다며 섭외할 만한 구역들을 알려주었다. 우비를 입었지만 비에 쫄딱 젖은 김 기자님은 현장에서 철수하며 해맑게 “수습 파이팅!”이라고 외쳐 주셨다. 타사이기는 했지만 본인도 겪어본 시절을 생각하며 챙겨주시려는 것 같아 감사했다.
반지하 섭외에 앞서 세 모녀가 돌아가신 빌라에 들어가 봤다. 현관문과 창문은 모두 뜯겨 있어 내부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입구에는 뜯긴 폴리스라인이 널브러져 있었고, 집기는 전부 치워졌지만 침수됐던 흔적이 고스란히 보였다. 침수된 탓에 강하게 풍기는 매캐한 냄새는 돌아가신 세 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키웠다.
빌라에서 나와 반지하 섭외에 나섰다. 바로 옆에 부동산이 있어 가볼 만한 곳이 있는지 물어보기로 했다. 들어가서 기자라고 하니 먼저 와계신 분들이 있다고 했다. 통신사, 신문사 기자님들이 계셨다. 다른 매체였지만 타사와 차별점을 둔 기사가 나가려면 단독으로 섭외를 하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부동산에서 나와 발품을 팔기 시작했다. 모든 집에 찾아가 볼 필요는 없었다. 이전에 부업으로 배달을 했던 경험이 있어 주택들의 구조가 훤히 보였다. 비슷한 피해가 있었을 법하고 낮에 사람이 있을만한 주택 몇 곳을 찾아갔다. 세 번째 집에서 혼자 계신 할머니를 뵙게 됐다.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흔쾌히 촬영과 인터뷰에 응해주셨다.
할머니께서 계신 집도 지난 폭우 때 피해가 컸다고 했다. 다행히 지하로 물이 완전히 차오르기 전에 이웃들이 할머니를 밖으로 모셨다고 했다. 이후 집은 완전히 침수되었는데, 도배와 장판도 교체한 지 얼마 안 되어 다시 태풍과 함께 많은 비가 내린다니 걱정을 많이 하셨다. 이미 만일의 사태를 대비해 대피하기 위해 짐도 싸두셨다. 태연하게 말씀하셨지만 곳곳에 싸인 짐들에서 할머니의 걱정과 두려움이 보였다. 할머니의 트라우마가 걱정되었다.
섭외를 마치고 나와 뼈 선배에게 보고하니 이번에는 선배가 진행한 인터뷰 워딩을 풀어달라고 했다. 내가 사계시장과 신림동에 가있는 동안 선배는 구룡마을에 가 있었다. 아직 폭우 피해 복구도 끝나지 않은 구룡마을에서 태풍에 대비 중인 주민들을 취재하고 있던 선배였다.
그렇게 취재지원을 마치고 이른 시간에 퇴근을 했다. 종일 지난 폭우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분들을 만나고 여전히 피해 복구가 끝나지 않은 현장들을 마주하니 마음이 무거웠다. 사회부에 있다 보면 즐겁고 기쁜 현장을 마주하기는 힘들다. 그저 더 익숙해지리라 생각했다.
집으로 향하던 지하철역에서 우산 빗물제거기를 봤다. 첫 직장에서 내 사수가 구매해서 역마다 배치했던 제품이었다. 업체 미팅도 함께했었기에 사수 생각이 났다. 오랜만에 사수와 연락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무거운 마음을 가라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