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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각하는T Aug 10. 2024

인민민주독재·민주집중제...中공산당서 보이는 슬픈 한국

송재윤 맥메스터 교수의 '슬픈 중국 제1권-인민민주독재1948~1964'


중국 초기 내부 권력투쟁·對소련 정책 다뤄
마오쩌둥 '인민불굴정신' 강조...유물론과 차이

인간을 '인민' '적인' 구분..."인민만 발언권"
펑더화이, 당헌서 '마오쩌둥 사상' 삭제...숙청
핵기술 확보뒤 소련 흐루쇼프에 반목 본격화
대약진운동 비판 류사오치도 권력 배제돼

덩샤오핑, 본인 주도 '반우파투쟁' 잘못엔 침묵
한국도 직접민주주의 '소수에 대한 폭력' 만연


"중국 공산당의 잘못을 가감 없이 비판해 달라"→순수한·열의 있는 지식인층의 비판→"숨어있던 반동분자들이 너희였구나"→숙청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초기에 있었던 반우파투쟁, 백화제방 등 '정화운동'은 항상 이런 루틴을 반복했습니다. 마오쩌둥은 이 같은 방식을 '양모'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불렀다고 합니다. '음모'가 나쁜 목적으로 몰래 꾸민 흉악한 계약인 반면, 양모는 좋은 목적으로 공공연히 꾸민 공공선의 책략이라는 겁니다.


캐나다 맥메스터대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송원형 교수는 '슬픈 중국' 3부작 중 제1권으로 중국 공산당 정부가 대륙을 대부분 점령한 1948년부터 문화혁명이 시작되기 직전인 1964년까지의 중국사를 다룹니다. 우리나라와 매우 밀접하고 세계적인 영향력이 강한 세계 2위 인구대국(14억2400만명. 1위는 인도 14억4100만명)의 중국의 근대사에 대해 별로 없는 분들이(저를 포함해) 많을 겁니다. 저는 마오쩌둥과 덩샤오핑,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처럼 몇 가지 인물과 사건들만 더듬더듬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 책은 그 당시 중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궁금증을 해결해 주기에 충분했습니다.


1945년 8월 전범국가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한 뒤 그간 항일운동을 해 오던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은 본격적으로 대륙 패권을 두고 전쟁을 합니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 지위는 중국 국민당이 갖고 있었고 당연히 일본군이 물러난 기지 등에는 국민당군이 들어섰어야 했지만, 공산당군 역시 재빨리 전국 각지에 들어가 세력을 장악합니다. 1946년 6월 국공내전이 본격화했고 1948년 민간인 15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되는 창춘 포위전에서 가장 격화됐으며, 1949년 1일 공산당이 베이핑(베이징. 베이핑은 국민당 정부 당시의 명칭)을 점령한 뒤 그해 10월 톈안먼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 성립이 선포됩니다.


중국 공산당 이념노선은 인민민주독재라는 점에선 소련 공산당의 궤를 이어받습니다. 중국 헌법은 인민민주독재를 "전국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하는 인민에게는 민주를 실시하고, 극소수의 적대분자들에게는 독재를 실시하는 통치의 방법"이라고 규정한다고 합니다. 중국 교과서는 인간을 절대다수의 인민과 '역사적 흐름에 역행하는' 적인(敵人)으로 구분한다고 합니다. '다수의 의한 소수에 대한 핍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은 소련 공산당과는 차이 역시 큽니다. 왕밍 등 '모스크바 유학파'가 아닌 중국 토착 공산주의자인 마오쩌둥이 권력의 중심으로 활동했기 때문입니다. 도시 노동자들 대신 산간의 농민들을 규합해 공산사회를 만들려는 시도부터 차이가 있습니다. 초기부터 차이를 보였기 때문에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1920년대부터 마오쩌둥의 혁명노선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소련은 연방제를 표방하고 각 연방의 탈퇴권까지 보장하고 있지만, 중국 헌법은 다민족국가를 표방하고 지역적 이탈을 금지했다는 점도 다릅니다.


마오쩌둥은 끊임없이 반대파 숙청을 이어갑니다. 초기에는 반대파 세력이 꽤 영향력이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전쟁영웅' 국방부 장관 펑더화이는 '마오쩌둥 숭배' 기조를 비판했고 그 결과 1956년 중국 공산당 당장(당헌)에서 '마오쩌둥 사상'이라는 단어가 삭제되기에 이릅니다. 펑더화이는 군사 노선을 두고도 마오쩌둥과 갈등을 이어갑니다. 펑더화이는 소련의 핵우산 아래에서 낙후된 공산당군의 재래식 무기를 현대화하고자 했지만, 마오쩌둥은 자체 핵기술 확보를 우선합니다. 펑더화이는 1959년 '루산회의'를 통해 숙청됩니다.


덩샤오핑은 소련으로부터 핵무기 기술을 어느 정도 확보한 뒤부터는 소련과도 반목을 합니다. '토착 공산주의자'인 그의 이념은 애초부터 소련과는 온전히 일치되지 않은 터였습니다. 1958년 8월 러시아 흐루쇼프가 두 번째로 베이징 방문했을 때 마오쩌둥이 의도적으로 결례를 행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집니다(201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당시 리선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 우리 측 기업인들을 향해 "냉명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느냐"라고 말한 것이 생각납니다. 무언가를 얻어내고자 하는 공산당식 결례가 아닐까요).


<중국 근대사 주요 사건 일지>

1938년 스탈린 '볼셰비키 당사, 속성 강좌' 발간

1945년 9월 일본, 난징에서 국민당에 항복의식

1946년 6월 국공내전 본격화

1947~1948년 창춘 홀로코스트

1949년 1월 베이핑(베이징) 점령

19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정부 성립 선포. (직전 9월에 마오쩌둥 '인민민주독재' 제창)

1949년 12월 마오쩌둥 첫 모스크바 방문. 스탈린의 70세 생일. 홀대당함

1950년 10월 한국전쟁에 참전

1956년 흐루쇼프, 스타킬 격하 운동 제시하며 '속성강좌' 전면 부인.

1957년 11월 마오쩌둥 모스크바 방문. 볼셰비키 혁명 40주년. 마오쩌둥은 흐루쇼프를 치켜세움 "스탈린 인격숭배 비판은 소련공산당의 현명한 조치"

1957~1958년 반우파 투쟁

1957~1962년 대약진운동(참새 대학살, 인민공사 1958년까지 2만6576개 설립, 산업시설 국유화와 농업 생산 집산화, '뒷마당 제철소' 토법연강. 1958~1962년 3600만~4500만 명 아사)

1956년 마오쩌둥 "스탈린 업적은 공칠과삼"(혁명가가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성과)

1956년 중국공산당 당장에서 '마오쩌둥 사상' 삭제(펑더화의가 인물숭배 비판한 영향)

1958년 8월 러시아 흐루쇼프의 두 번째 베이징 방문. 마오쩌둥은 의도적으로 결례(핵무기 기술 확보 완료).

1959년 6월 핵무기 개발 시작

1959년 루산회의. 마오쩌둥이 펑더화의 전 국방부 장관 팽

1959년 덩샤오핑, 중앙서기처 총서기 맡음

1961년 흐루쇼프, 모스크바 소련공산단 전국대표회의에서 저우언라이에게 "더는 마오쩌둥을 인내할 수 없다"

1962년 1~2월 '7천인 대회' 류사오치 "3년간의 대기근은 삼분천재, 칠분인화", 원칙은 옳았지만 간부들의 과도한 열정과 경험 부족 때문에 착오. 대약진운동 실패로 마오쩌둥 2선 후퇴. 덩샤오핑, 실용주의 개혁 시도(~1966년)

1964년 10월 중국, 핵실험 성공

1965년 11월 평론가 야오언위안이 우한의 '해서파관'을 "펑더화이 옹호, 마오쩌둥 사상 능멸" 평론 발표(문화혁명의 시작)

1966년 문화혁명(~1976년). 덩샤오핑은 두 번에 걸쳐 농촌서 재교육. 덩샤오핑은 홍위병들도 농촌 하방 시킴.

1969년 류사오치 사망(1966년 4인방이 특별조사단 만들어 처벌)

1976년 마오쩌둥 사망

1978년 덩샤오핑의 집권과 개혁개방. (문화혁명 비판, 반우파투쟁은 침묵)

1980년 덩샤오핑, 자산 계급의 자유화 반대 성명

1980년대, 덩샤오핑, 정치국상위의 상무위원으로서 중앙군사위원회 주석으로 군림(중국공산당의 주석이자 중앙위원회 총서기는 후야오방, 후야오방을 '자산계급 자유화' 지지 혐의로 직위 해제)

1989년 6월4일 톈안먼사태. 4월15일 후야오방 사망->4월22일 톈안먼서 장례식->6.4 톈안먼 사태). 희생자 200~1만 명 추정


무소불위의 권력을 거머쥔 마오쩌둥은 두 가지 역사적 참극을 벌입니다.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이 그것입니다.


대약진운동은 공산주의 체제를 강화하면서 경제를 키우겠다는 전략이었는데 참담한 실패로 끝납니다. 낭비되는 쌀알을 줄이겠다며 '참새 대학살'을 벌였고, 농장과 산업시설을 집산화하겠다면 전국에 2만6576개의 인민공사를 설립합니다. 미국과 영국의 철 생산량을 따라잡겠다며 농가 뒷마당에 소규모 제철소를 만드는 비상식적 정책도 추진합니다. 그릇된 경제정책은 1958~1962년 추정치 3600만~4500만 명의 아사자를 발생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아무리 독재자라고 하더라도 대약진운동의 실패 앞에 마오쩌둥도 온전할 수는 없었습니다. 류사오치는 1962년 '7천인 대회'에서 "3년간의 대기근은 30%는 자연재해이고, 70%는 인재였다(삼분천재, 칠분인화)"라고 비판합니다. "원칙은 옳았지만 간부들의 과도한 열정과 경험 부족 때문에 착오가 있었다"며 마오쩌둥을 직접 공격하지는 않으면서도 그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이에 마오쩌둥은 2선으로 후퇴하고 덩샤오핑과 류사오치가 실용주의 개혁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마오쩌둥이 1966년 문화혁명을 일으키며 다시 전면에 복귀한 뒤 10년간 중국 대륙은 또 한 번 혼란에 휩싸입니다. (문화혁명은 슬픈중국 제2권에서 본격 다뤄질 예정입니다).


이 같은 혼란은 1976년 마오쩌둥이 사망하면서 일단락됩니다. 이후 재집권한 덩샤오핑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합니다. '대약진운동' 등 과거사에 대한 역사적 평가도 다시 이뤄집니다. 그러나 덩샤오핑이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반우파투쟁'에 대한 반성은 이뤄지지 않습니다.    


이 책을 읽으며 오늘날 한국 사회가 오버랩됐습니다. 토론은 자유롭게 하되 일당 당론이 결정되면 일사불란하게 따른다는 레닌의 '민주집중제'는 오늘날 거대 정당에서도 이뤄지고 있습니다. '직접민주주의'라는 미명으로 사실상 다수에 의한 소수의 폭력을 행사를 요구하는 정당의 지지자들의 모습도 떠오릅니다.


슬픈 한국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드는 '슬픈 중국-제1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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