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만 모르는 나의 민낯
아이가 경시대회를 몇번 봤다. 처음에는 경험상 해보는 게 좋겠다며 선택한 일이 단순 경험을 넘어 수상이라는 경험까지 하게 되면 더할나위 없겠다는 욕심으로 번졌다. 횟수를 거듭할 수록 실수만 하지 않으면 만점도 맞을 수 있다고 착각을 더했다.
애타는 부모 마음과 달리 아이는 시험을 본 후에 좀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잘 봤으면 잘 봤다, 어려워 못 봤다 하면 될 것을 모른다고만 한다. 잘 한건지 못 한건지 모를 정도면 어떤 상태란 말일까. 그렇게 표현하는 심리는 궁금하지만 더 묻지 않고 아이가 그렇게 말하는 것은 전략적 모호성일 수 있다는 착각에 빠졌다.
잘 봤지만 극적인 효과를 위해 잘 봤다고 말하지 않는 상태라고 말이다...
아이는 비교적 쉬운 난이도에서는 우수한 성적을 거뒀지만 고난이도 시험에서는 영락없이 평균이하의 점수를 받았다. 그럼에도 아이는 전혀 말하지 않던 컨디션을 엄마인 내가 탓했다. '네가 컨디션만 좋았으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거야. 정말 아쉽다.' 라고. 물론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지만 속내는 진심 그러했다.
그뿐인가. 학원에서 경시 공부도 시켜주는 세상이니 그렇게 준비하거나 기출 문제집이라도 꾸준히 풀어보면 좀 나은 성적을 거둘 수 있는데 넌 전혀 안해서 그렇지 조금만 하면 성적은 쑥 올라갈거라는,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렇게 자식을 믿었다.
그런데 최근 세번째 경시를 본 후에야 착각이 지나쳐 거의 허황된 믿음 수준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번 경시는 학원에서 조금 준비를 시켜줘 평소보다는 아주아주 잘 볼거라는 기대를 했다. 문제는 '아주아주'에 있었다. 아이가 조금씩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점은 보이지 않고 기대했던 점수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 낙심부터 했다.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 겉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엄마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달되지 않았을리가 없다.
언젠가 엄마는 성적에 민감하다고 아이가 말한 적이 있다. 전혀 그런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여긴지라 그냥 하는 소리라 여겼다. 평소 조금이라도 좋은 점수를 받아오면 좋아하던 엄마의 모습에서, 굳이 1등해라 하지 않아도 공부 잘하면 좋아하는구나 싶어서 그리 표현했을텐데, 왜 그렇게 느꼈냐고 묻기보다는 변명을 둘러댔다. 1등보다는 2등이 더 행복해질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아이는 무슨 거짓이냐는 듯, 피식 웃었다.
그렇게 아이에게 나의 민낯은 훤하게 드러나 있었다. 나만 모른 채.
성경은 '착각'의 근원을 교만이라 한다. 반면 <착각의 쓸모, 샹커 베단텀 著> 와 같은 책에서는 착각은 자기 기만에서부터 오지만 사회적 유대를 강화하고 신체적 변화를 긍정적으로 이끌며 불안함을 해소하는 등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는 실용성이 있다고 말하며 착각의 쓸모에 대해 말한다.
나는 아이에게 왜 기대하고 착각하며 허황된 믿음을 갖게 되었는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라는 말은 내게 그냥 글자였지 체화된 것은 아니었다.
아이는 노력하고 싶어하고, 잘 하고 싶어하고,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어하는 마음은 많지만, 최고나 1등이 목표인 아이는 아니다. 경쟁에서 이기는 길만이 인생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경향성도 짙다. 좀 천천히 가더라도 스스로 깨닫고 싶어하지 길러진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아한다.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나의 허황된 믿음은 내게 어떤 이득을 가져다주는지를 가만히 생각해봤다.
이제라도 근본적인 출발을 알아야 올곳이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자세가 될 수 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
나를 부여잡고 있는 믿음은 일하면서도 아이 하나는 똑 부러지게 잘 길렀다는 사람들의 평가를 받고 싶은 욕구, 그러니깐 아이 덕을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 그 집 엄마는 일하면서도 아이는 정말 잘 키웠어 하는 그 말 한마디 말이다. 오늘 이렇게 힘들게 사는 내가 무척 대견스럽게 여겨질 것 같은 착각 말이다.
아이를 빌미로 일을 더 열심히 하고자 할 것이며 경제적인 자신의 효용 가치를 더욱 극대화하기 위해 담금질 하게 될 것이라는, 그러다가 정말 아이가 멋지게 성적으로 보상하게 되면 얼마나 행복할까 하는 착각.
하지만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아이는 아이의 인생이 있다. 최선을 다해 아이와 함께 하되, 적당한 경계가 필요하다. 자식은 나를 영원히 착각 속에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기에 지금이라도 깨어나야 한다.
간혹 친정엄마와 대화를 하다 보면, 내가 아는 나와 엄마가 아는 내가 달랐던 이유를 이제야 조금 알것 같다. 엄마는 내가 집과 학교밖에 모르는 순둥이였다고 말하지만 주변의 친구들은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불안한 스타일이라고 했다. 누구 말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거는 엄마가 말한대로 나는 순둥이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나에 대한 엄마의 끝없는 착한 아이라는 규정은 사람들 모여있는 자리에서 확대 재생산되었고 나는 졸지에 모범생이 되어버려 엄마에게 그만 좀 하라고 짜증을 낸 적도 더러 있었다. 그때 엄마는 뜨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애가 요새 사춘기라서 그래요'라며 수습을 했고 나는 더욱 짜증을 냈다. 그래서였을까. 나는 엄마가 없으면 허전하면서도 있으면 불편하고 싫었다.
철없던 시절을 지나 이젠 내가 엄마처럼 자식에 대한 허황된 말들을 쏟아내기 일보직전인 건 아닌지, 조금 두려워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