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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연 Sep 01. 2023

[직관과 단상] 7.중년의 우정

-우리는 남인가!

삼십년 쯤 전 일이다. 대학 졸업반이었던 것 같다. 어느 날 이른 새벽, 친구로부터 전화가 왔다. 손바닥만한 자취방에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댔다. 지방에 계시던 부모님도 이른 새벽에는 전화를 하지 않았기에 처음엔 잘못 걸려온 전화인가 했다. 


친구는 다급하고도 간곡했다. 8시까지 선릉역으로 나와줄 수 있겠냐고 했다. 뭔 일인지 물어도 도통 답을 하지 않았다. 일단 좋지 않은 일일 수도 있겠다 싶어 더 묻지 않고 이빨만 닦고는 지하철에 올라탔다. 2호선은 그때도 미어터졌고 숨조차 쉬기 어려웠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만난 친구는 너무 황당하고 허탈한 말을 전했다. "한달에 천 만 원도 벌 수 있대"라는 대목에서는 화가 치밀었다. 손목을 잡아끌고는 집에 가자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거꾸로 좋은 기회를 놓치는 거라며 말리는 나를 되려 안타까워 했다.  제발 한 번만 자신을 위해 함께 가줄수 없겠냐고까지 했다. 그때는 다단계가 판을 치던 시절이었고 그 친구는 돈을 많이 벌어 집에서 독립하는 게 꿈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친구에게 당시 얘기를 하자 겸연쩍게 웃었다. 당시 나는 혼자서 선릉역을 빠져나와 열심히 주변 선배 친구들에게 전화로 상황을 전했다. 절대로 응하지 말고 응할 시 구출이 목표여야 한다고.  친구는 나에게 꺾인 후 더 이상 엄두를 낼 용기가 나지 않았다고 했다. 용기 내 연락을 해도 도통 아무도 응해주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돌린 전화만도 수백통이라며 전화요금 물어내라고 농을 친 적이 있다. 

친구, 선배와 구출단을 꾸리는 작전도 꾸미고 집에 연락할까도 궁리하고, 경찰서에 신고하자는 얘기까지, 그렇게 대책회의를 하며 밤세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지금 돌이켜 보면 코믹 영화를 찍은 거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절실했고 긴박했다. 




사회에서 만나 이십년 가까이 연을 이어오는 이들이 있다. 친구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내온 사람을 뜻하니, 이십년이면 친구라고 칭해도 될 것 같다. 그 친구들은 일이라는 공통 요소로 묶였고, 서로 저마다의 이유로, 특정한 계기로 상호 신뢰하게 된 관계다. 


하지만 그 친구들은 이른 새벽에 전화를 하는 경우는 커녕 그 흔한 술먹고 전화를 하는 경우는 일절 없다. 아주 예의바른 관계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철들어 만난 관계라 그런 곡절이 없다고 해야 할까. 아주 가끔 만나 세상사는 이야기 나누며 이런저런 소식을 공유하고 서로 처한 상황을 위로하는 소소한 대화들이 오고간다. 드라마틱한 반전이나 결정적인 위기는 없다. 


그런데 최근 우리 사이에도 조금씩 균열이 가는 게 느껴진다. 이 역시 세월이 가면 그랬나 싶기도 하겠지만, 지금으로썬 서로가 말하지 않는 섭섭함이나 서운함이 느껴진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중년의 우정이란 게 그럴 법도 하다. 우리는 일하면서 알게 된 사이들이고 여차저차 취미나 관심사, 성격이나 살아가는 방식 따위가 유사해 친구가 되었지만 실상은 서로 이해관계가 완전히 배제된 관계는 아니기 때문이었다.  


가령, 누가 창업이라도 한다 싶으면 도움이 될만한 일은 없는지를 찾아서 홍보 댓글이라도 달아줘야 한다. 물론 과장광고는 아니되겠지만 그 정도는 성의에 가까운 행위다. 


각자 먹고 살기 바쁘다 보니, 자주 못 만나 정확히 헤아리기도 어렵지만 개중에는 몹시 복잡하고 힘든 상황에 놓여있는 이가 있을 터인데 배려받지 못하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별 도움이 안된다고 여겨 거리를 두는 것이 아닐까 싶다.  




중요한 건, 그걸 확인하려 하느냐, 아니면 일단 시간을 두고 기다려보느냐 그 차이다. 물론 이런 태도가 나이별 우정을 대하는 일반화된 구별은 아니지만, 예전같으면 득달같이 전화해 왜 그러냐, 무엇이 문제냐, 내가 당장 갈께 그러하겠지만. 또 실제 행동으로 옮겨 밤늦은 시간이라도 그 친구 집앞을 찾아가건 하겠지만 지금은 일단 그럴 에너지가 솟아나질 않으니 뭘까 싶다. 


단순한 귀찮음은 아닌 것 같다. 그냥 이또한 시간이 가면 다 지나가리라 하는 마음이 짙다. 

어차피 내가 짊어질 수 있는 무게는 정해진 것이고 그 친구가 짊어져야 할 몫도 있으므로, 각자 짐은 각자가 책임지는 게 마땅하다는 실용논리 같은 게 우정에도 적용되는 것 같아 씁쓸하다. 


물론 모든 중년의 우정이 나와 같진 않다. 여전히 애뜻하고 전폭적이며 열정적인 우정을 가꾸는 이들이 있다.

2001년 곽경택 감독의 영화 친구가 800만 관객을 돌파하며 돌풍을 불러일으킬 때 탄생한 유행어 "우리가 남이가"라는 말이 있다. 그런 우정을 한편으로는 부러워하지만 실상은 그리 하지 못한다.  

친구도 결국 남이다. 내가 너일 수 없고 네가 나일 수 없다. 이런 생각은 삶에서 터득한 진리에 가깝고 나이가 들면서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약이라는 생각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오늘은 용기를 내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한번 해봐야겠다. 잘 지내는지. 전화는 에너지가 많이 필요한 일은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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