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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민희 Sep 03. 2021

두 번째 들어가는 영국

프랑스 자동차를 운전하는 외국인

  

 ‘여기가 맞나?’ 자동차 핸들을 붙잡고 어두운 창밖을 둘러봤지만 가로등 몇 개가 듬성듬성 서 있을 뿐인 부둣가는 암흑 자체였다. 아무래도 이곳은 아니었다. 시간은 밤 11시, 페리를 예약한 새벽 5시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길을 잘못 든 듯했다.

 이곳은 프랑스 북부, 도버 Dover 해협에 면한 항구도시 칼레 Calais였다. 파리에서 차를 빌린 후 북서쪽에 위치한 디에프 Dieppe 항구에 도착했었지만 다시 200km를 달려 여기 깔레까지 온 것은 순전히 저렴한 페리 값 때문이었다. 어둠 속에서 낯선 길을 세 시간이나 달려온 터라 피곤함이 몰려들었지만 길을 찾아야 했기에 다시 시동을 걸었다. 고작 100m쯤 나아갔을까, 페리를 타는 이정표가 보였다. 한적한 길을 쭉 따라가자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생긴 곳이 나왔다. 겹겹이 세워진 철망에 축구장만큼이나 거대한 공터가 아무리 봐도 페리 승선장은 아니었기에 이미 한 번 지나쳤던 곳이었다. 하지만 이 늦은 시각에 길을 물을 사람도 없었기에, 정체 모를 공간에 다가갔다. 다행히 안전요원인 듯 사람이 보였다.


“저기요! 실례지만 영국으로 가는 페리를 타는 곳이 어딘가요?”

차창을 내리자 세찬 바람이 몰아쳐 거의 고함을 치다시피 해야 겨우 내 목소리를 전할 수 있었다.

“영국으로 가는 페리요? 저기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철망 사이로 길이 있어요! 그 길을 끝까지 따라가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날은 8월 30일, 아직 더위가 남아 있는 늦여름이었지만, 바닷가의 밤바람은 한겨울만큼이나 맹렬했다. 근처에서 길을 헤매는 사람들이 종종 있는지 안전요원이 알려준 철망 사잇길에는 기다렸다는 듯 경찰차가 있었다. 경찰이 데려다준 곳은 아까 잘못 들었던 곳의 반대편길이었고, 고속도로 톨게이트처럼 보였던 곳은 알고 보니 출입국 관리소였다.

차를 타고 배에 오르기 때문인지, 영국과 프랑스 간의 협약이 있는 건지, 일반적으론 도착지에서 받는 입국심사를 출발지에서 했다. 때문에 프랑스 땅이지만 관리는 영국에서 했다. 영국 경찰은 밀입국자에 대한 우려에 항구 곳곳을 삼엄하게 경계하고 있었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인데도 대낮처럼 불을 밝힌 거대한 광장에는 톨게이트 같은 작은 부스마다 입국 심사를 받으려 수 십 대의 자동차가 줄지어 서 있었다. 페리만 타면 된다는 생각에 무작정 달려왔건만, 까다로운 영국 입국 심사를 난데없이 맞닥뜨린 나의 긴장감은 극에 달했다. 마침내 내 차례가 되자 부스에 앉은 입국 심사관은 내 얼굴과 자동차 번호판, 그리고 내게서 받아 든 여권을 의심 가득한 눈으로 훑었다.

 

“혼자인가요? 차는 당신 건가요? 얼마나 머물 예정이죠? 직업은 뭐죠? 무슨 목적으로 영국에 가려 하나요?”

그래, 누가 보더라도 나는 일반적이지 않았다. 외국인이 혼자서, 프랑스 자동차를 타고, 영국 치즈를 찾아다니겠다니.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두 달이나. 입국 심사관의 눈초리가 매서운 건 당연한 일이었다.

“차를 저 옆으로 주차하세요.”


나는 아주 의연한 척 심사관이 가리킨 자리에 주차를 했다. 그러고는 제복을 입은 경찰을 따라 별도로 마련된 사무실 건물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입국 심사에서 석연치 않아 불려 들어온 듯한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심장이 온몸을 흔들어대듯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범죄자로 낙인찍힌 기분이었다. 더욱이 나는 다른 사람들처럼 줄을 서지도 않고 곧바로 다른 입국 심사관이 배정됐다.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그의 눈초리는 조금 전 밖에서 마주쳤던 심사관보다 훨씬 매서웠다. 긴장해서 작은 실수라도 저지른다면 앞으로의 여행이고 뭐고 다 틀어질 판이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가 요구하는 모든 자료를 침착하게 하나하나 꺼내 보여주었다. 5분쯤 지났을까, 그가 내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내 눈빛이 흔들리는지를 확인하는 것이 보였다. 마지막으로 빌린 자동차를 프랑스에 반납하는 날짜와 소지한 신용카드 등급까지 설명하자 입을 굳게 다문 심사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파란 잉크를 묻힌 도장을 집어 들었다.

 “입국 후 6개월 안에 떠나시오. 칼레 30. AUG. 2013.”


배를 타기까지 시간이 남았음에도 수 많은 차들이 영국으로 입국하기 위해 대기중 이었다. 저들도 나처럼 입국심사를 거쳤을까 거대한 모험을 마친 기분이었다.

주섬주섬 늘어놓은 여권과 서류들을 챙겨 사무실을 나와 모퉁이에 세워둔 차에 타자 기온이 낮아서였는지 잠깐 맞은 찬바람에 치아가 부딪칠 정도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오리털 점퍼까지 꺼내 입었지만 떨림은 가라앉지 않았다. 시동을 켜고 히터를 틀고 차를 움직여 ‘도버 Dover로 향하는 배 타는 곳’이라는 표지판 앞에 주차를 하고 사이드 브레이크까지 채우자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날은 파리에서 차를 받은 지 사흘 째 밤이었다. 자동 기어보다 저렴해 비용을 아끼려고 빌린 수동기어 차의 시동을 꺼뜨려 도로에 수십 번을 세워야 했던 첫날을 지나, 캠핑 장비를 마련하느라 밥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이케아와 카르푸를 종일 돌아다닌 둘째 날을 넘어, 뱃값 아껴보겠다고 익숙하지도 않은 자동차로 프랑스 북쪽 해안선을 200킬로미터나 운전해 와 심장이 오그라들 것 같던 입국 심사까지 드디어 마쳤다. 꼭 이렇게까지 일을 벌여서 치즈를 봐야 하는 것인지, 혼자 시작한 일에 누구도 원망 못 할 서러움이 몰려 울음을 터트린 것이었다.

영국의 절경 중 하나인 하얀 암석 절벽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웅장했다. The White Cliffs Of Dover

하늘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오기 시작한 이른 아침, 프랑스 칼레를 떠난 배가 영국 도버항에 가까워지자 영국 땅을 휘감은 듯 웅장한 흰 암석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갑판 위에서 다시 마주한 영국 땅은 그렇게 새로울 수가 없었다. 이제 저곳에 가면 또 다른 치즈들을 만날 수 있을 테고, 이제 내게는 시골 구석구석 누빌 자동차도 있으니 겁날 것 하나 없었다. 보고 싶은 것 원 없이 보자. 망망대해에 소망을 풀고 있으려니 차츰 불어난 사람들이 페리 지하의 주차장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나도 그들을 따라 주차장으로 가 차에 올라탔다. 앞뒤로 바짝 붙여 주차된 차들 사이에서 시동을 거는 것이 다소 불안했지만(수동 기어는 시동을 걸 때마다 차가 앞으로 튀어 나가지 않을까 무서웠다), 다행히 별 덜컹임 없이 시동이 걸렸다. 차들은 게이트가 열리자마자 페리 밖으로 쏜살같이 빠져나갔다. ‘도버항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표지판을 반길 겨를도 없이 나도 그들을 따라 도로를 내달렸다. 한참 달리다 보니 그 많던 차들은 금세 사라졌고 도로는 한적했다. 그러고 보니 주말 아침이었다. 영국에 다시 오기까지 고생 많았던 지난 며칠이 아련했다. 여유로운 기분에 젖어들던 그때, 옆에서 누군가 경적을 울렸다. 무언가 이상했다. 2차선 도로에서 우리는 거의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나는…… 역주행 중이었다!     


굳이 프랑스까지 가서 자동차를 빌려온 이유가 있었다. 프랑스에는 외국인 대상 리스 제도가 있어 한 달 이상을 빌릴 경우 렌터카보다 훨씬 저렴한 데다, 풀 커버리지 보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가장 큰 이유는, 핸들 위치에서부터 도로 주행 방향까지 모두 한국과 반대인 영국의 교통 시스템이었다. 영국에 한 달 반을 있어도 횡단보도 방향조차 거꾸로 보고 걷는 본능을 저버리지 못한 판국에 운전이라니,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하지만 결국 본능을 잊지 못한 역주행 운전은 두 번이나 있었으니, 따라갈 차가 없는 텅 빈 도로에서의 공포감은 한동안 계속됐다.

도버항의 게이트가 열리고 자동차 바퀴가 땅에 닿자 영국에 다시 왔음을 실감했다.

차를 갖고 어렵게 영국으로 다시 넘어왔지만, 어디부터 가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새벽녘 어느 해변 주차장에서 잠이 들었다. 쏟아지는 햇볕에 부스스 눈을 떠보니 한적했던 주차장은 어느새 자동차로 가득했다. 이불 삼아 덮었던 오리털 점퍼를 걷어내고 몽롱한 채 턱을 괴고 앉았다. 진짜 영국으로 넘어오긴 했는데 어디로 가야 하나, 누굴 찾아가야 하지. 휴대폰의 유심칩을 사야 내 위치를 파악하든 할 텐데……. 간밤의 사투와는 다르게 눈부신 햇살 아래 선글라스와 스카프를 두른 관광객들로 넘치는 해변은 전혀 다른 세상이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자. 나는 무작정 주차장을 빠져나가 대형 쇼핑몰을 찾아냈고, 유심칩을 구해 인터넷이 되자 낯설고 먼 땅에 고립된 듯했던 마음에도 안정이 찾아왔다. 이제 캠핑장을 찾아가자. 그래! 캠핑장! 우선 그곳에 가서 씻고 밥을 먹자. 그런데, 이 넓은 땅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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