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 우유로 만드는 치즈

레드레스터 치즈 만들기의 시작

by 민희 치즈

다음 날 아침, 작업장에 도착한 나는 이전 농장들에서 그랬듯 흰 장화와 흰 셔츠를 받아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머리카락은 묶어서 망으로 꼼꼼히 갈무리한 뒤, 전날 만났던 아주머니 앞에 반듯한 자세로 섰다.

“됐네요. 좋아요.”

그녀는 어제와 달리 경계심이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그녀가 나오라고 한 아침 8시보다 1시간 앞선 7시에 농장에 도착했는데, 덕분에 우유가 막 배트에 채워지는 것부터 볼 수 있었다. 우유는 전날 저녁에 짠 것과 당일 새벽에 짠 것을 섞어 쓴다. 작업자들은 총 4,500리터에 달하는 우유로 가득 채운 배트를 데우기 시작했다. 스테인리스로 된 배트는 이중 구조로, 외벽과 내벽 사이의 파이프에 온수를 흘려보내 배트를 데우는 방식이었다(한국 주택의 온수 보일러와 같은 방식이다). 냉장 탱크에서 보관된 차가운 우유와 젖소에서 갓 짠 따뜻한 우유가 섞여 16℃였던 우유 온도는 10분 후 21.6℃가 됐고, 그러자 곧 스타터가 투입됐다.


1시간 후 우유 온도가 30.9℃까지 올라가자 작업자들은 액체 상태의 아나토를 부었다. 주황색 염료는 하얀 우유에 닿자마자 여러 갈래로 뻗어가더니 대리석 무늬를 그려냈다. 우유의 깊은 속까지 색이 잘 물들게 저어주자 이내 우유 전체가 옅은 주홍빛을 띠었다. 염색제를 넣었을 때의 우유를 상상해보기는 했지만, 실제 주홍빛으로 물든 우유는 낯설었다. 크롭웰비숍에서 스틸턴 치즈를 만들 때도 우유에 푸른 액체를 넣긴 했다. 하지만 그건 색소가 아니라 곰팡이균이었기 때문에 푸른색은 번지다가도 곧 우유에 흡수되었다. 물론 우유의 색도 변하지 않았다.

아나토를 부어 넣은 우유의 표면 -주황색 염료는 하얀 우유에 닿자마자 여러 갈래로 뻗어가더니 대리석 무늬를 그려냈다.
크롭웰비숍의 블루스틸턴은 제조 과정 중 우유에 푸른곰팡이균을 넣었지만 우유의 색을 변화시키진 않았다.

아나토 염료를 부어 넣은 후 우유를 응고 시키는 투명한 레닛이 부어진다.

우유에 색을 들이는 이 과정은 아주 오래전부터 해온 작업일 것이다. 나 역시 프랑스의 미몰레뜨 치즈 Mimolette Cheese(이 치즈 역시 진한 주황색을 띤다)와 같이 색이 있는 치즈를 이미 여럿 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완성된 치즈를 보는 것과 출렁이는 주홍색 우유를 마주하는 건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나토가 잘 섞인 우유에는 이제 레닛이 부어진다. 레닛이 우유를 응고시킬 동안 온도는 31℃를 유지한다. 이곳에서도 어김없이 우유가 응고되는 동안 작업자들은 휴식을 취했다. 다시 작업장으로 돌아온 것은 40분 후였다. 치즈 메이커인 셰빌 아저씨가 배트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그는 납작한 치즈 나이프로 푸딩처럼 찰랑거리는 커드를 떠서는 맛을 보라며 내밀었다.

“어때? 달콤하지? 우유 상태가 좋은 거야. 우유 상태가 좋으면 커드도 달지.”

수분 가득한 커드가 입안에서 뭉개지며 진한 우유 맛이 녹아 나왔다. 이곳에서는 살균하지 않은 우유 Raw milk를 사용하는데, 때문에 소가 어떤 풀을 먹느냐에 따라 치즈 향이 달라진단다. 예컨대 비가 많이 내린 날은 풀 상태가 축축하고 좋지 않아 치즈 향이 풍부하지 않은 반면, 날씨가 좋아 햇빛을 많이 본 건조한 풀을 먹으면 우유 상태도 좋고 치즈에서도 좋은 향이 난다는 것이다. 셰빌 아저씨는 오늘 우유 상태가 그야말로 최고라고 했다.

커드를 자르는 작업이 진행될 때 우유는 파도처럼 출렁 거린다. 흡사 작은 우유 바다 처럼.


우유가 담긴 배트가 클 때엔 두 명이 함께 커드를 잘라도 힘에 부칠 정도다.
치즈 메이커인 셰빌 아저씨가 배트 앞에 서서 나를 불렀다. 그는 납작한 치즈 나이프로 푸딩처럼 찰랑거리는 커드를 떠서는 맛을 보라며 내밀었다.
커드를 작게 자른 후 훼이를 배수로를 통해 내보내면 비로소 붉은 커드만 배트에 남는다. 이후 이 커드를 담아 틀에 넣는 작업이 바로 이어진다.


*비살균 우유 Unpasteurized milk or raw milk

젖소에게서 짠 뒤 어떤 가공도 하지 않은 우유를 말한다. 박테리아, 효소 등이 자연 그대로 유지되어서 치즈에 복잡한 풍미를 만들어낸다. 이뿐만 아니라 숙성 단계를 거치는 동안 실패할 확률이 낮다고 한다. 때문에 치즈 메이커들 사이에는 비살균 우유에 대한 신뢰가 매우 크다. 하지만 우유를 짜내는 과정에서나 보관 과정에서 균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음료로 바로 마실 경우 인체에 질병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860년대,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프랑스 미생물학자 루이 파스퇴르 Louis Pasteur가 저온 살균법을 개발한다. 저온 살균이란 63℃의 온도에서 30분간 가열하는 방법이다. 비살균 우유를 먹었을 때 인체에 발생했던 질병들, 가령 결핵이나 장티푸스 발병률이 줄어들자 1908년 미국에서는 저온 살균을 법제화하기에 이른다. (고온 살균법도 있다. 72℃의 온도에서 15초간 살균하는 것으로 뜨거운 파이프에 우유를 짧은 시간 동안 지나가게 하면서 살균하는 방법이다. 초고온 살균법도 있는데, 130~145℃의 온도에서 1초 이상 살균하는 것으로 실온에서 보관, 판매되는 음료에 이 방법이 사용된다.)


1900년대 이전까지 수세기 동안 유럽의 모든 치즈는 비살균 우유로 만들어졌다. 비살균 우유를 사용하는 것이 곧바로 균에 의한 질환으로 이어지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실제로 비살균 우유로 만든 치즈로 인한 질병 발병률이 높지 않다는 결과도 있다.

그러나 치즈는 긴 숙성 치즈든 짧은 숙성 치즈든 박테리아 검사를 주기적으로 해야 한다. 또한 우유는 착유와 동시에 냉장 보관해 균의 발생을 방지하거나 혹은 바로 치즈 제조에 사용해야만 오염의 가능성을 피할 수 있다. 많은 치즈 제조자가 비살균 우유로 만든 치즈야말로 전통적인 풍미를 잃지 않은 진짜 치즈라고 주장하지만, 살균 우유로 만든 치즈들이 전통의 맛을 잃은 것 또한 아니다. 영국의 원산지 명칭 보호 제도(PDO-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의 치즈 제조 규정에는 치즈에 따라 살균 우유와 비살균 우유가 모두 적용된다. 예를 들어 스틸턴 Stilton의 경우 살균 우유로 만드는 것이 규정이지만 싱글 글로스터 Single Gloucester(글로스터 치즈 부분 참조)의 경우 살균과 비살균을 선택해 만들어도 PDO의 규정에 어긋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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