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흘을 묵힌 커드로 만든 치즈

랭커셔 치즈 Lancashire Cheese

by 민희 치즈

가장 독특한 영국 치즈


13세기부터 영국 중북부 농가에서 만들어오던 랭커셔치즈는 ‘가장 독특한 영국 치즈’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나흘을 묵힌 커드로 만든 치즈이기 때문이다. 농장에서 짜낸 하루치 우유를 치즈 제조에만 썼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지만, 마시거나 빵을 만드는데 쓰거나 시장에 내다 팔고 나서 남는 우유의 양은 많지 않았다. 때문에 일단 커드로 만들어놓고 치즈 제조에 충분한 양이될 때까지 사흘이고 나흘이고 모은 것이다(최대 2주까지도 모았다고 한다.) 이는 점차 랭커셔 치즈만의 독특한 제조법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만들어온 치즈일 뿐 농가마다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왔기에 제조법은 일정치 않았고, 13세기에 만들어진 랭커셔 치즈는 지금의 랭커셔 치즈와는 다르다고 알려져 있다. 제조법이 정리된 것은 19세기 말에 이르러서다. 1890년, 랭커셔 지역 공무원들이 농가를 다니며 치즈 제조법을 모아 정리했고 이를 농가에 교육시킨 것이다.

이 제조법은 지금까지도 쓰이고 있으며 잘 알려져 있는 랭커셔 치즈 제조법 중 하나다. 이렇게 만들어진 랭커셔치즈는 대부분 랭커셔 지역에서 소비됐지만 1500년대에 리버풀(당시에는 랭커셔주에 속했다)에서 런던까지 배로 운송됐다는 기록도 있다. 이후 2차 세계대전 중 다른 치즈들과 마찬가지로 정부의 생산 제한 목록에 들어갔고, 1939년 202곳이었던 랭커셔 치즈 제조 농장은 1948년에 22곳으로 줄어들더니 1970년대에는 7곳으로 줄어들었다. 그리고 그 일곱 곳 중 한 군데가 바로 이곳 커크엄 랭커셔 농장이다.

커드를 숙성하기 위해 최대한 수분을 빼는 작업을 하는 모습. 오른쪽 작업자가 그레이엄이다.


‘미세스 커크엄 랭커셔 치즈’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농장의 창업자는 미세스 커크엄, 즉 그레이엄의 어머니 루스 커크엄이다. 루스 타운리와 존 커크엄은 50여 년 전 결혼했고 남편 존이 두 살 때부터 살았던 비슬리 농장 Beesly Farm에서 생활을 시작했다. 15세기에 지어진 농가에 살며 젖소를 키웠는데 우유 가격이 떨어지자 아내 루스가 농장 한쪽에 있던 작은 건물을 치즈 제조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어머니가 쓰던 도구들을 챙겨 왔다. 그녀는 외할머니 때부터 3대째 전해 내려오는 전통 레시피 그대로 비살균 우유를 이용해 랭커셔 치즈 제조를 시작했다. 농장에서 키우는 홀스타인 프리지안 젖소**에서 남편 존은 우유를 짰고, 루스는 사흘간 숙성시킨 커드로 치즈를 만들어야 했기에 부부는 일주일에 7일을 일했다.

시간이 흘러 세 명의 아이가 태어나는 동안 농장 규모가 커졌고, 동시에 랭커셔 치즈 제조량도 늘었다. 세 자녀 중 유일한 아들인 그레이엄이 가업을 잇기 위해 치즈 제조를 배우기 시작한 것이 벌써 20년 전, 2007년엔 낡은 제조장 건너편에 새로운 치즈 제조장을 세웠다. 그 사이 젖소 수도 많이 늘어 지금은 2013년에는 100두가 넘는 중견 농장이 됐다. 루스는 이제 랭커셔 치즈의 전통이 잘 유지되게끔 아들 그레이엄을 돕고 있고, 남편 존은 여전히 젖소를 돌보고 있다. 커크엄 가족이 비살균 랭커셔 치즈를 이어올 수 있는 건 기본에 충실한 방법을 고집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들은 이 전통성을 매우 자랑스러워한다.


**홀스타인 프리지안 젖소 네덜란드의 북부와 프리슬란드 지역 그리고 독일 북부가 원산지인 젖소다. 유축할 수 있는 우유의 양이 많고 지방과 단백질의 함량이 높아 치즈 만들기에 수율收率이 높다. 전 세계에서 목축에 가장 많이 애용되며 우리나라의 젖소 대부분 또한 차지한다. 하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얼룩덜룩 있어 젖소의 대표 이미지 이기도하다.




조금 다른 아침의 시작

다른 농장들에서는 보통 아침 6시, 늦어도 7시에는 치즈 제조가 시작되는 데 비해 이곳에서는 8시가 넘어서야 배트에 우유를 채우기 시작했다. 그레이엄이 함께 작업하는 사람들을 소개해주었다. 나란히 선 에이미와 사라는 치즈 데어리에서 흔치 않은 20대 중반 여성인 데다, 일란성쌍둥이였다.

“헐로우, 전 에이미예요. 이쪽이 동생 사라고요.”

‘헐로우’라는 강한 억양이 이곳이 영국 북부임을 실감케 했다. 에이미가 먼저 치즈 제조 일을 시작했고, 1년 후에 동생 사라가 들어왔단다. 대리석처럼 하얀 피부에 앞치마와 머리망을 착용하고 20대 같지 않은 차분한 모습으로 일하는 그녀들은 꼭 중세시대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 같았다.

그레이엄은 배트에 우유가 다 채워지자 스타터를 넣었고, 30분 뒤에는 레닛을 넣었다.

“이제 아침 먹으러 가요. 우유는 저 상태로 1시간 반 동안 둘 거예요.”

입고 있던 가운과 장화를 벗고 다 같이 작업장을 나섰다. 농장 마당을 가로질러 지붕이 낮고 붉은색 격자 창문이 있는 집에 도착해 문을 열자 음식 냄새가 가득한 부엌이 바로 보였다. 그곳은 그레이엄의 부모님, 즉 커크엄 랭커셔 농장을 세운 루스와 존의 집이었다. 부엌에서는 어머니인 루스가 손수 요리하고 있었다. 에이미와 사라는 익숙한 듯 식탁에 자리 잡고 앉으면서 내게도 자리를 권했고 그레이엄까지 모두 앉자 갓 구운 베이컨에 노른자가 선명한 반숙 달걀 프라이, 치즈까지 완벽한 잉글리시 브랙퍼스트가 차려졌다. 얼른 먹고 다시 일해야 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는 좀 얼떨떨해 머뭇거렸다. 내가 예상한 아침은 (다른 농장들에서 그랬듯이) 썰렁한 휴게실의 작은 테이블에 모여 앉아 밀크티에 각자 챙겨 온 차가운 샌드위치를 먹는 것이었다. 같이 앉아 있지만 따로 앉아 있는 느낌, 단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잠시 모인 어색한 쉬는 시간이어야 했다.

루스의 식탁은 우유에 레닛을 넣는 아침 9시, 커드를 압축하는 오후 2시 그렇게 하루에 두 번 차려졌다. 3cm가 넘는 두툼한 패티가 빵 밖으로 튀어나온 햄버거, 채소며 햄과 고기가 가득 차 있는 코티지 파이 cottage pie**, 입안을 상큼하게 해 줄 토마토 샐러드, 밀크티, 주전부리로 먹을 빵 등 메뉴는 매번 바뀌었다. 그 작은 주방에 우리가 도착하면 루스는 뜨거운 기운이 가득한 요리를 오븐에서 꺼내거나 기름으로 찰랑이는 프라이팬에서 튀기고 있던 음식을 내오고는 했다. 식사가 거듭되자 나는 자연스레 내 자리를 찾아 앉게 됐고, 식사를 마치고 나서도 그레이엄 식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천천히 일어서곤 했다. 그레이엄의 사촌이 놀러 오기도 하고 조카가 옆에서 뛰어다니는 등 정말 집에서의 식사였다. 대화의 주 내용은 내가 어떻게 그곳까지 찾아오게 되었으며 치즈 공부를 왜 시작했는지였고, 나는 제조 과정에서 궁금했던 것들을 몰아서 그 시간에 그레이엄에게 물어보곤 했다. 그러면 그 대답을 식구들이 함께 해주곤 했다. 식탁 의자에 등을 최대로 기댄 채 밀크티를 마시며 나는 내 이야기를 했고 그들은 그들의 오랜 농장 이야기도 해주었다. 사람들이 오는 시간에 맞춰 내어 주는 따뜻한 엄마의 음식을 먹을 때면 나는 낯선 타지도 아니고 치즈 제조장도 아닌 그저 오랜 친구의 집에 머무는 듯했다. 그레이엄의 친근했던 첫인사처럼.


**코티지 파이 다진 고기와 채소를 넣고 맨 위에 으깬 감자를 올려 오븐에 넣어 감자가 바삭하게 되도록 구운 파이다. '시골의 작은 농가의 파이'라는 운치 있는 이름과 달리 1700년대 후반 가난한 농촌의 사람들에게 적당한 식용 작물로 감자가 소개되면서 시작된 음식이다. 재료는 여분의 구운 고기(종류는 상관없다)와 각종 채소로 조리법은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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