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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Jun 21. 2023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릴 때 나를 일으켜 세우는 것

Ep.2 신이 필요한 시간 (1)

모든 사람은 저마다 삶의 가장 중요한 가치가 있다. 인생에서 눈물이 빗물처럼 흘러내리는 순간까지 이겨낼 힘이 돼 주는 것들. 가족, 돈, 명예, 권위 같은 게 아닐까.


 20대 내내 내겐 예술이 있었다. 예술을 향한 사랑으로 어떤 성취를 이뤄내고 싶었다. 스물한 살에 멋모르고 들어간 예술학교의 영향이 크긴 했지만, 지금 돌이켜봐도 예술이 추동하는 강력한 열정은 우릴 집요하게 좀 먹는 현실만큼 힘이 세다.


인생 시즌1을 끝내며, 나는 진심으로 삶의 밸런스를 찾고 싶었다. 20대 땐 그렇게 끔찍해하던 ‘현실과 타협’도 하고 싶었고, 나쁜 영화를 봐도 남들처럼 무던하게 평을 하고도 싶었다.


인생은 참 잔인하고 재밌다. 이런 생각을 하자마자 우리 팀이 피와 뼈를 갈고 쥐어짜 만들던 영화잡지가 잠정 휴간을 하게 됐다. 그 소식을 듣고 하늘을 보며 허허허 헛웃음이 나왔다.


내 모든 것이던 영화가 사라졌다. 공허함과 더불어 새로운 세계를 향한 호기심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예술 그다음의 가치는 많은 사람처럼 나도 ‘가족’이었다. 극장에도 미술관에도 안 가고 주식창을 들여다 보고 사회 경제 기사를 열심히 읽던 2년 전. 나의 첫 번째 부모, 그러니까 어린 시절 양육을 도맡아 준 외할머니는 병이 깊어져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염하는 모습을 보며 깊은 슬픔 속에서 한세대가 저물어 가는 것을 보았다. 맛집 요리를 똑같이 카피할 정도로 총명하셨던 할머니. 아들을 편애하면서 장녀에게 의지해 온 우리 할머니. 단 한순간도 행복하지 못했던 우리 할머니. 그래서 많이 울었다.


놀라운 일은 6개월 후에 일어났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동갑인 외할아버지는 할머니의 치매와 혈관성질환을 3년 넘게 보살피셨을 만큼 강골이셨다. 할아버지는 장례식장에서도 꼿꼿이 앉아 나랑 소주에 육개장을 드셨다.


그러다 당신과 똑 닮은 동생 분이 오시자, “나는 이제 어떻게 사냐”며 갑자기 아기처럼 눈물을 터뜨리셨고, 작은 외할아버지는 손을 잡고 “우리 형 이제 어떻게 하냐”라고 같이 우셨고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나도 또 울었다.


외할아버지는 세상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던 남자였다. 외할아버지를 향한 생애 첫 기억은 아마 네 살 때쯤 “내 걸음이 퍽 빠른데, 어찌 이리 잘 걷냐”는 칭찬이었다.

구수한 담배 냄새가 나던 그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또 할아버지 쌀가게로 오고 가던 그 길이 행복했다. 무뚝뚝한 아빠에게 받지 못한 인정과 칭찬을 몰빵 해주던, 나의 첫 아빠.



그분이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6개월 만에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그 소식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할아버지가 무슨 위암이야? 식사를 그렇게 잘하시는데.”


내가 철이 없었다. 당신께선 아픈 게 아니고, 아프고 싶으신 거였다. 입원 전에 “할아버지, 아프면 죽잖아, 안 무서워?”라는 당돌한 내 질문에 할아버지는 “어쩔 수가 없는 거야”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어렴풋이 느꼈다. 지난 몇 년 간 할머니를 보살피던 게 할아버지 생의 목표이자 가치였고, 이제 그게 사라졌으니 이젠 그만 가시고 싶어 하신 것을. 나는 원체 성격이 급했던 할아버지의 병환이 얼마나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지 매주 보게 됐다.


그러다 지난해 3월 둘째 주, 해외 출장이 잡혔다. 별안간 잡힌 출장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출장이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꿔 놓을 줄은 몰랐다.


- ‘신이 필요한 시간’(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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