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아이의 엄마가 되기까지, 지나온 길 위에서 나는 다시 나아갑니다.
둘째를 낳고 하는 조리는 조리가 아니었다.
첫째를 케어하면서 동시에 신생아를 돌보고,
그 와중에 나 자신까지 챙겨야 했다.
말은 쉽지만, 그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누구나 출산 후엔 “조리 잘 해야 한다”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지만,
그 말은 현실 속 엄마에게는 지켜지기 힘든 주문이었다.
‘조리’라는 단어는 내게 선택지가 아니라,
그저 멀리서 바라보는 그림의 떡 같은 단어였다.
무엇이든 하나는 포기해야 했다.
아이를 돌보는 일을 포기할 수는 없으니
결국 뒤로 밀려나는 건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첫째의 밥을 챙겨주고,
나는 늘 남은 밥이나 식은 반찬으로 허기를 달래기 일쑤였다.
그마저도 허둥지둥 입에 넣다 보면
금세 둘째의 울음이 터졌고,
숟가락을 내려놓은 채 아기를 품어야 했다.
그 순간마다 나는 잠시 숨을 고르며 생각했다.
‘조리는커녕, 오늘도 밥 한 끼 제시간에 먹기 힘들구나.’
그런 사소한 순간들이 쌓여 마음 한켠이 점점 닳아갔다.
그와 동시에 마음은 조금씩 빛을 잃어갔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선 얼굴이 보였다.
피부는 거칠어지고, 눈 밑에는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그늘은 점점 짙어져 어느새 표정마저 삼켜버렸다.
나는 분명 같은 사람이었는데,
거울 속의 나는 나 같지 않았다.
‘엄마’라는 이름 아래 나는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엄마로 살아가는 일이
왜 이렇게 나를 투명하게 만드는 걸까.
누군가의 세상을 지탱하는 동시에,
나의 세계는 조금씩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 누군가의 전부였지만,
정작 나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백일 된 아이를 안고 집을 보러 다녀야 했다.
바람 끝이 유난히 매서웠던 그 해의 겨울이었다.
한겨울의 공기가 뺨을 스치면
피부는 얼얼하게 시리고, 마음은 더 쓸쓸해졌다.
시댁과의 합가 생활이 끝나며
우리는 갑작스레 분가를 준비해야 했다.
뜻하지 않게 찾아온 변화였다.
누구에게도 충분히 설명할 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아침이면 첫째를 등원시키고,
그 사이 잠시 들이마신 커피 한 모금이
유일한 나의 ‘쉼표’였다.
첫째를 등원시키고 둘째를 품에 안은 채 부동산을 돌았다.
아기를 감싸 쥔 품 안은 늘 따뜻했지만,
그 품을 덮고 있던 바깥 공기는 너무 차가웠다.
하얀 입김이 흩어지는 좁은 골목길을 걸으며
나는 계속해서 다짐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엄마니까, 나는 엄마니까..”
하지만 점점 팔이 저리고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다.
아기를 안은 어깨는 늘 뻐근했고,
손끝이 얼어붙을 만큼 추웠다.
그래도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우리가 살 집을 찾아야 했으니까.
그 시절의 나는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듯 울컥하곤 했다.
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한 몸으로
계속 밖을 돌아다니니 체력은 바닥나 있었다.
밤이면 온몸이 쑤셨고,
그보다 더 힘들었던 건
불안이 덮쳐오는 마음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숨이 막히듯 답답해져
가슴 위에 손을 얹고
억눌린 무언가를 꾹꾹 눌러가며
‘괜찮다, 괜찮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그건 괜찮지 않았다.
그렇게 찾아온 건 산후우울증과 공황장애였다.
눈앞이 하얘질 만큼 숨이 가빠오면
나는 벽에 기댄 채 한참을 서성였다.
“나 왜 이러지?”
누구에게라도 묻고 싶었지만,
입 밖으로는 끝내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누구도 내 마음을 깊이 들여다봐 주진 않았다.
누군가 단 한 번이라도 “괜찮아?” 하고 물어줬다면
그 말 하나만으로 버틸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말 한마디가
그토록 간절했지만 끝내 들을 수 없었다.
나는 혼자 견뎠고,
그 비참함은 오래도록 내 마음에 자국처럼 남았다.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시간이 흘러도 쉽게 흐려지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기대지 못한 그 겨울,
그 시간은 내 몸보다 내 마음을 더 얼어붙게 만들었다.
몸은 언젠가 회복되었지만,
그 마음의 한기는
지금까지도 아주 느리게, 아주 천천히 녹아내리고 있다.
누가 그랬다.
인간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진정한 ‘망각의 동물’은 어쩌면 나 자신이 아닐까 하고.
연년생 형제의 육아에 지칠 대로 지쳐,
하루에도 몇 번씩 울컥하고, 주저앉고,
산후우울증과 공황장애에 시달리던 내가,
결국 다시 한 번 아이를 품었으니 말이다.
그 반짝이는 별과도 같은 막내딸을 세상에 품어낸 건,
아마도 잊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지난한 시간의 고통,
그 수많은 밤의 눈물과 후회,
그 끝없는 피로를.
망각했기에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망각했기에 또다시 사랑할 수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통스러운 날들을 잊었다 여기고 살지만
문득 문득 떠오르는 날들은
아직도 내 코끝을 시리게 만들기도 한다.
모순되고 불완전한 마음,
때로는 무너지고 때로는 다시 일어서는 이 감정들 속에서
나는 조금씩 ‘엄마’라는 이름에 다가가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은 언제나 공존했다.
아이들을 돌보며 정말 죽을 만큼 힘든 순간이 수도 없이 찾아왔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텅 비었지만
그때마다 아이의 밝은 얼굴,
짧은 웃음, 작은 손짓 하나가
불행을 한참 뒤로 밀어내곤 했다.
그 짧은 웃음 하나가
나의 하루를 버티게 했다.
나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좋은 엄마일까?
아니, 그보다…
‘좋은 엄마’가 되어야 한다는 말에
너무 집착하고 있는 건 아닐까?
좋은 엄마를 떠나
나는 정말 엄마로서의 자격이 있는 사람일까.
삼남매를 품을 그릇이 되기에
나는 충분히 단단한 사람일까.
그 질문에 대한 답을
나는 아직도 찾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배운다.
육아를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무엇보다 ‘엄마로 존재한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어제도 그랬고,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또 그럴 것이다.
앞으로의 나도 여전히
아이들을 품으며,
수많은 날들을 견디고, 넘어지고, 일어서며
조금씩 더 ‘엄마가 되어가는 중’일 것이다.
나는 완벽한 엄마는 아니지만,
오늘도 아이 곁에서 배우며,
조금씩 더 ‘엄마’가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