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볍게 동네 산책을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의 일이다.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 인근에서 앞서 걸어가고 있던 할아버지와
옆에서 부축하고 있는 젊은이가 보였다.
부자관계로 보이는 이들을 지나쳐가려 하는데
갑자기 걸음을 멈추더니 수줍게 웃으며 내게 말을 건네는 젊은이.
저기.... 죄송한데
이쪽 길로 지나가시나요?
저는 반대방향으로 가야 해서
혹시 가시는 길이시면
어르신 부축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그 순간 두 분은 일행이 아니었다는 걸 알게 되었고
다리가 불편한 어르신을 부축하던 젊은이가
가는 길의 방향이 바뀌게 되자 일명 부축 바톤터치를 제안한 것이었다.
흔쾌히 할아버지의 팔짱을 내가 끼고 부축 해드리자
젊은이는 연신 감사하다고 인사를 건네며 떠났다.
천천히 한 걸음씩 걸으며 어르신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나와 같은 아파트에 사시지만, 가장 마지막 동에서 살고 계신다고 한다.
난 맨 첫 번째 동이라 조금 둘러서 가는 방향이긴 하지만
어르신을 모시고 집 앞까지 바래다 드리기로 했다.
병원 갔다가 오는 길인데...
지난번에도 넘어져서 아주 곤욕을 치렀거든.
아들이 두 명 있는데,
다 타지에 나가있어서....
고마워요.
아들만 두 명이란 말씀에 이제 형제만 남은 우리 가족과 비슷해서
자연스레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 역시 암투병으로 몸이 안 좋아지시면서
옆에서 부축해드리지 않으면 거동을 하실 수 없었으니 말이다.
서울에서 지내고 있었던 못난 아들은 주말이나 연차를 썼을 때에만
부산에 내려와 병간호를 했으니, 이해하시면서도 섭섭한 마음도 있지 않으셨을까.
아버지께선 파고라라고 흔히 부르는 인조목을 만드셔서
필요로 하는 모든 곳에 직접 시공을 하시는 자영업을 하셨었다.
일감이 많을 때엔 직원을 두기도 했지만, 무거운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인조목 대신
점차 실제 수목을 선호하는 곳이 늘어나게 되었고
줄어든 수주의 공사는 우리 가족이 종종 아버지를 거들어야 인건비를 절감할 수 있었다.
"내일 혹시 특별한 일 있나?"
종종 아버지께서 이렇게 물어보실 때의 의도는 한 가지뿐이었다.
내일 아주 특별한 일이 없어서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인조목을 싣고 현장에 설치하러 함께 가자는 뜻이다.
새벽 일찍 나가서 아버지의 화물차에 무거운 인조목을 싣고 여러 현장으로 갔었다.
공공기관, 학교, 공원, 가정집부터 멀리는 통영의 연화도라는 섬으로도 갔다.
아래 사진은 아버지가 시공하셨던 인조목 설치 현장의 일부이다.
부산과 인근 지역의 곳곳에 닿아있는 아버지의 손길.
일부러 다시 찾아가 본 곳은 없지만, 우연히 아버지께서 설치하셨던 인조목을
어디선가 직접 마주하게 된다면 어떤 감정을 난 느끼게 될까.
나름 열심히 일을 도와드리려고 노력했지만,
참 힘든 일이라 가기 싫은 내색도 했었고
이런 내 눈치를 아버지가 보시기도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의 고된 작업들이
아버지를 추억할 때 떠올릴 수 있는 소중한 추억이 됨을 못난 자식은 이제야 알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