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볶음밥

열 번째 끼니 - 3

by 빛새

배가 고픈 삼월의 어느 날. 나는 집에서 홀로 저녁 식사를 해 먹었다. 오래간만에 조용히 먹을 수 있는 지금 뭘 해 먹을까 고민하다가 스팸 하나와 김치를 털어 김치볶음밥을 해 먹었다. 고요히 밥을 먹다가 문득 이 노래가 떠올랐다.


'김치볶음밥을 잘 만드는 여자.'


바로 변진섭의 <희망사항>이었다. 이 노래는 자신의 이상형인 여성을 노랫말에 담았다. 자신이 사귀고 싶은 여자를 솔직하게 밝혔기 때문에 80년대 당시에도 사회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2023년 현재에도 많은 가수가 여러 노래에서 오마주를 하고 있으니, 그 파급력은 얼마나 셌을까. <희망사항>을 떠올린 김에, 나의 이상형 이야기를 꺼내 보았다.


내가 사귀고 싶은 완벽한 이성을 이상형이라 부른다. 어떤 이는 키 큰 사람을, 어떤 이는 예쁜 사람을, 다른 이는 성격 좋은 사람을 이상형으로 삼듯이 사람의 취향은 천차만별이다. 그중에서 내 이상형은 딱 보고 '이 사람이다.' 하는 느낌이 오는 사람이다. 적당히 이쁘고, 말이 잘 통하는 사람이다.


그럼 나는 언제부터 이성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을까? 많은 사람은 10대 청소년 시기부터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게 된다. 사춘기가 지나고 2차 성징을 겪으면서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이 작용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레 이성에 관한 관심도 높아진다. 하지만 나는 너무나 처절한 10대를 보냈기 때문에 이성에 대해 생각할 수 없었다. 내가 살기 바쁜데, 남을 돌볼 여유가 있었을까? 돌이켜보면 슬프지만, 그때는 어찌할 수 없었다.


파란만장한 10대를 보내고 나서, 어찌어찌 20대가 되었다. 지긋지긋한 학교를 벗어나 조금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즐겼다. 자유로운 생활을 하게 되니 멋진 여자가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마음 가는 여성에게 들이대 보고 큰맘 먹고 좋아한다고 얘기했지만,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내 몸에 음울한 아우라가 깃들어있었기 때문이었다.


10대에서 20대가 되면서 나의 생활은 더 편해졌다. 하루 10시간씩 학교에 있을 필요가 없었고, 주 5~6일 등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남는 시간에 마음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에 음울하게 보냈다. 상처받은 마음으로 매일을 살았기 때문에 나를 가꾸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우울하고 부정적인 아우라가 나를 감쌌다. 뾰족하고 날카로운 모습만 보여주니 그 누가 날 좋아했을까.


시간은 재빨리 흘러 어느새 30대가 되었다. 어두웠던 마음은 나와 주변 사람들의 노력 덕분에 조금씩 밝게 바뀌었지만, 이제는 현실의 벽에 부딪힌다. 아무것도 이뤄놓지 못했다는 자책감과 경제적 독립을 이루지 못한 무능력 때문에 관심 있는 상대에게 쉽게 다가가기 어렵다.


지금까지의 내 삶을 돌이켜보면, 순수하게 사랑받을 수 있을 때는 마음이 아팠고, 현실적인 사랑을 해야 할 때는 그 현실에 못 따라가니 갑갑했다. 이러다간 이상형이 이상향이 되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된다.


그래도 난 누구인가, 그 어려운 삶을 겪고 어떻게든 살아남은 사람 아닌가? 저승의 문 너머에서 방황하는 어린 자신을 이승으로 인도했던 스즈메처럼, 지금의 풍랑을 이겨내고 날마다 살다 보면 나와 함께할 사람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여보세요 날 좀 잠깐 보세요.

희망 사항이 정말 거창하군요.

그런 여자가 너무 잘 어울리는

난 그런 남자가 좋더라.


PBSE1115.jpg 열 번째 끼니 - 김치볶음밥, 김치찌개, 김치만두, 봄동 겉절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