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 고등학교가 함께 있는 데다 체육관도 큼직하게 자리 잡고 있어 마치 대학교 캠퍼스를 거닐고 있는 느낌마저 든다. 학교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인도를 따라 500m쯤. 바쁜 아침 출근길에는 이 멋진 교정과 전통 있는 저 교사(학교 건물)가 얄미울 때도 있다. 작고 아담한 학교였다면 버스 정류장에서 보건실까지 5분이면 될 텐데.. 하는 생각에 숨을 헉헉 거리며 잰걸음으로 다닥다닥 투덜투덜 걸어 올라가 곤한다.
학교마다 교육의 이념과 목표가 다르고, 학교장의 교육 정책과 철학에 따라 다양한 교육계획이 수립된다. 크게 봐서는 전혀 변화 없는 교육의 터전이지만, 세밀히 살펴보면 나름대로는 변화가 많은 편이다.
제자리에 있는 듯 답답해 보이는 교사도 있고, 열정 열정 열정! 을 다해 재빠른 움직임과 기민한 대처가 돋보이는 교사도 있다. 각자의 역할을 나름대로 충실히 해내고 있고, 사람들이 모여 형성한 교육 테두리 내의 한 사회이므로 빠른 사람 느린 사람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 다정한 사람 무관심한 사람 등등이 공존하는 학교이기도 하다.
쌤들은 정교사와 기간제 교사가 있다. 블랙독이라는 TVN 드라마를 상당히 재미있게 봤던 기억이 난다. 여자 주인공 서현진이 참 예뻐서 더 관심이 갔던 드라마였지만, 사실 실제 교육 현장에도 그 여주인공에 버금가는 예쁜 선생님 멋진 선생님들이 계시기도 하다. 많지는 않지만;;
블랙독의 교무실과 교실은 현실과 제법 가까웠다. 전교권 학생들과 학부모님들 그리고 특별반과 의대 관련 동아리 등의 이야기는 보건교사인 내가 세밀히 알 수 없는 영역이므로 시청자의 눈으로 단순히 흥미롭게만 지켜보긴 했었다.
햇살 좋은 3월의 어느 날 아침! 새로 근무하게 된 이 학교에서 후다닥 적응하기 위해 성격 급한 나는 오늘도 몸부림치며 땀 흘리고 있었다. 성격 같아선 전교생 이름을, 아니 보건실에 자주 오는 주요 고객 50여 명쯤의 이름은 일주일 안으로 외워버리고 싶었고, 요보호 학생과 건강상의 문제가 있는 학생도 머릿속에 싹 넣어버리려고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무엇보다도 함께 근무할 선생님들 역시 나에겐 또 다른 주요 고객이므로 실수 없이 적응하고자 주요 보직 쌤들과 내 주변쌤들 위주로 그 성함들을 콕콕 기억해버리고 있다.
한글 이름이 많이 늘어나서 남학생 경우에 보람이, 가람이, 한빛, 어울, 하늘, 소중, 한강, 이로울 등의 이름도 제법 보인다. 사람의 이름을 보면 어떤 사람일지 느낌이 오기도 하고, 학생의 얼굴을 보면 인근 어느 중학교를 졸업하고 왔을지 느낌이 올 때도 있다.
그럴 때면 학생들은 "오우, 쌤 어떻게 아셨어요? 소오름! 자리 까세요."라며 우스개 소릴 해대기도 한다. 그런 촉의 연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사실 뭐든 놓치지 않으려고 하는 내 더듬이가 8할이겠고, 그 학생의 복장과 태도, 지난번에 누구와 함께 보건실이 왔었는지, 무슨 얘길 했었는지 조각조각을 순간적인 힘으로 합쳐내어 빵! 하고 불어 보면 7~80%는 맞출 수 있다. 하하하 놀란 아이들의 얼굴을 보는 재미도 솔솔~
그러던 내가 손꼽히는 대실수를 저지른 날이 왔다! 말할 때마다 c발c발을 달고 사는 이 학교의 고딩들을 보며 처음엔 좀 많이 놀랐다. 한 달가량 지나면서 c발에 익숙해지고만 내 귀가 좀 걱정스러웠지만, 일단 내 귀로 들어왔으나 내 입에서 나가지 않으면 땡! 인간승리!라는 생각으로 적절히 적응하며 지내던 어느 날.
등교하자마자 머리가 아프다며 보건실 침대에 눕길 원하는 두 농땡이를 다시 교실로 올려 보냈고, 등교하자마자 축구하다 슬라이딩한 후 왼쪽 정강이부터 허벅지와 궁둥이 살갗까지 쭈욱 벗겨진 녀석을 드레싱 해주고 그렇게 30분쯤 흘렀을 때, 어떤 녀석이 들어왔다.
교복을 제대로 안 갖춰입으면 벌점을 받게 되지만 애들은 연연하지 않았고, 입만 열면 "저 벌점 신경 안 써요. 정시로 대학 갈 거예요."라고 말한다.
3년 동안 내신과 세특 동아리 활동과 수상 내역등등을 모두 모두 모두 꼼꼼히 신경 쓰며 입시 구멍을 뚫고 가는 수시전형으로 말하자면... 성적은 기본이요, 꼼꼼함과 성실성, 실수 하나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러나 수능에서 자기가 응시할 과목만 꾸준히 공부하여 모의고사 위주로 훈련하여 수능날 하루 점수가 잘 나오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들 믿는 정시 전형은 대부분의 남학생들이 목표로 하는 바이기도 하다.
우리 학교 교복 바지는 베이지색, 이 녀석은 딱 봐도 교복 하의가 아니라 슬랙스 느낌의 발목 부분이 깡총한 면바지를 입고 등장했다. 상의 역시 교복을 입지 않았고 라운드 티셔츠 차림.
요즘 남학생들은 흰 교복 안에 검정 티셔츠 또는 흰 면티를 받쳐 입는 것이 유행이라서, 티셔츠 차림은 하등 이상하지 않았다. 짧게 자른 단정한 헤어스타일은 범생이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때 인지했었어야 했다! 그의 존재에 대해!
보건실에 들어오면 일단 보건교사에게 어디가 아픈지 얘기하고 약을 먹을지 지켜볼지 안정실에 누워서 쉬어볼지, 심할 경우 조퇴를 하고 병원에 갈지 등등을 의논하게 된다.
그날의 그놈은 보건실 미닫이 문을 스르르 열자마자 나를 힐끗 한번 쳐다보고는 바로 침대로 걸어갔다.
"야! 너!"라고 불렀지만 뒤통수만 보이며 보건실 안쪽 안정실 문을 열고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야! 이 자식이!" 비속어를 좋아하지만 학교 내에서 자제하고 있는 나에게 그놈의 태도는 내 입으로 하여금 비속어뿐만 아니라 욕설까지 나오게끔 자극을 주었다.
"야! 이놈아! 보건실에 왔으면 쌤한테 얘길 하고 들어가야지! 너 몇 학년 몇 반 누구니? 으이그! 이리 와 이리 와!"라고 손가락을 까닥 까딱 하며 면박을 주는 순간 상대방의 눈빛이 흔들렸고, 뭔가 잘못되었구나 직감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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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선생님... 저는 국어과입니다. 이름은 한상*이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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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앗. 죄송합니다. 어머낫.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실수했네요. 실례했습니다. 미안해요. 학생인 줄 알았어요. 동안이십니다. 어디가 불편하세요? 편히 좀 쉬세요. 편찮으신가 봐요. 좀 누웠다 가세요. 네네네."라고 말하고 뒤돌아 나왔다. 민망하여 후끈후끈 미안하여 조마조마 두피가 저릿저릿 팔뚝 닭살이 오돌토돌 해졌다.
작년까지 근무하셨던 보건쌤께 인수인계 받으면서 그 학교에는 남녀 교사 휴게실이 있으나 누울 공간은 없어서 간혹 많이 힘든 쌤들은 보건실 침대 한 칸에 잠시 누웠다 가신다는 이야기를 들기는 했었다.
3월 학기 초라 그 어떤 쌤도 눕기 위해 보건실에 온 경우는 여태 없었던 터, 쌤이 들어와서 침대로 바로 걸어가 누울 거라곤 생각도 못했으며, 그렇게 젊고 댄디하고 참한 남자가 학생이 아니라 교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던 불찰!
내가 아픈 학생과 대화 중이긴 했지만, 그래도 한마디 건네고 입실하셨었더라면 나에게 욕을 먹진 않았을 텐데... 얼마나 고단했기에 근무 중에 보건실 와서 눕나... 사실 불편한 마음도 들었다.
뒤늦게 안 사실이었지만, 등산을 좋아하시는 교장 선생님 호출로 일요일에 산에 올랐고 술도 한잔 기울이며 일요일을 보내어 월요일 오전에 좀 힘들었다고 전해 들었다.
수업이 없는 시간은 대부분 연구와 수행 과제 체크, 생기부 작성, 입시 분석, 공문서 업무 등 바쁜 시간을 쪼개어 쓰는 선생님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힘든 경우에는 보건실에서 쉬어 가기도 한다고...
아이스하키부, 테니스부, 사격부가 있다 보니 덩치 큰 고딩들도 많이 있다. 특히 아이스하키 선수들은 185cm를 훌쩍 넘는 키에 어깨도 넓고 트렁크고 커서 로봇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다. 또, 키만 우뚝 솟은 고딩들은 전봇대 같기도 하다.
농구부 배구부 아이들은 어쩔~ 야구부 아이들은 농구부에 비해 키가 크진 않지만 몸이 참 좋은 편이다. 이런 녀석들은 아까 그 한상* 선생님에 비하면 훨씬 아저씨스럽다.
슨생님~슨생님~ 쌤~쌤~ 하면서 너벌너벌 잘도 떠들고, 털썩 주저앉아서 갈 생각을 하지 않을 때도 많다. 이러니 학생도 교사도 파악이 완전히 되지 않은 3월에는 학생인지 선생님인지 쌤같은 학생인지 학생 같은 쌤인지 유심히 노려보고 예리하게 말을 걸어봐야 할 터!
사실 보건실은 첫째도 둘째도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지만, 의외로 참 많은 쌤들이 드나들기도 한다. 남고 특성상 쌤들이 학생들과 축구하다 다쳐서 오시기도 하고, 시설과나 청소 용역 직원분들은 까스활명수와 파스를 자주 찾기도 한다. 요즘은 코로나 시국이라 너도나도 타이레놀을 달라고들 하셔서 드릴 수도 안 드릴 수도 없는 애매한 부분도 있다.
아무튼, 그 국어과 한 선생님은 그렇게 누워 약 30분 정도 머물다 가셨고, 좀 괜찮냐는 질문에 고개만 끄덕이고 조용히 총총 나가셨다. 그 후로도 그 쌤을 마주칠 때면 괜스레 혼자 풉 하고 웃는다. 여전히 학생처럼 앳된 모습에 엄마 미소까지 발산하기도 했다.
애들도 아프지만 쌤들도 편찮으실 때가 있다. 아이들처럼 몸도 아프고 마음도 고단하신 것 같다. 보건실은 학교 누구나에게 열린 공간이니 언제든 따뜻하게 맞이해드린다. 어디가 아픈지 진심으로 살펴봐드리고, 도울 일이 있으면 정성을 다해 보살펴드린다. 학생도 귀하고 쌤들도 소중하다. 나와 함께 머무는 그대들이여 부디 건강하길,, 아프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