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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얼굴

Ep. 9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부정의 끝판왕

나의 낯빛은 깊고 진한 커피와 같은 색이다. 

아니 아니. 그냥 검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나이가 들면 자신의 외모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데 

나의 그것은 씻을 수 없는 중대한 범죄와도 같게 느껴진다.


어려서부터 까무잡잡한 피부를 갖고 태어났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임신을 하면 무언가가 간절히 먹고 싶다는데 우리 어머니는 그것이 짜장면이었다.

중국집에 가서 곱빼기를 먹고, 양이 모자랐지만 부끄러워 다른 중국집을 찾아가서

다시 곱빼기를 먹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쾌활하게 웃어넘겼다.

짜장면 대신 우유를 좋아했더라면 인생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상상을 할 뿐이었다. 

가뜩이나 검은 피부에 머리를 묶어도 될 만큼 긴 더벅머리 

사춘기의 시작으로 인중을 비롯한 얼굴의 절반을 덮은 잔털로 인해 

친구들로부터 '원시인'이나 '미개인'같은 놀림을 당하던 초등학생 시절에도 

미운 오리 새끼를 꿈꾸며 당당하게 바뀔 자신의 모습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젊음'하나로 모든 것이 개성으로 인정받던 전성기는 기대에 비해 매우 짧았다. 

오히려, 20여 년간 방송 프로듀서로 일하며 낮과 밤이 뒤바뀐 생활을 한 결과는 

참담할 정도로 냉혹하고 잔인했다.

피로에 찌든 고생을 장시간 반복하게 되면, 햇빛에 노출되는 정도와 피부 빛깔은 무관함을 깨달았다.

그러나, 같은 직종에서 근무한 사람들이 모두 그렇지는 않기에 핑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일과 상관없이 인생을 함부로 살아온 결과가 되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순진하게 너무 열심히 했겠거니... 덧없는 자기 위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설령, 원인을 찾는다고 현재의 모습이 바뀌는 것은 아니며 

결과는 지금도 매일매일 늘어가는 주름과 함께 거울로 확인하고 있다. 

파운데이션은 피부 톤이 어두울수록 숫자가 올라간다는데 50호가 나와도 소용없을 것이다.

내가 본 가장 높은 호수는 23호가 끝이었다.


은퇴 후 

상당한 시간과, 돈과, 약물의 힘을 들여 망가진 건강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였고

떨어진 자존감과 허탈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꽤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시간을 즐기며  마음의 재활을 통해 

스스로를 위한 긍정적 에너지를 지금도 심고 있다. 

심신의 안정은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았고, 득도에 이른 수행자처럼 

말로 형언할 수 없는 변화를 느끼며 살아있는 하루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놈의 얼굴은 세월의 주홍 글씨처럼 씻어낼 수가 없다.

그 어떤 클렌징 폼으로 세안을 해도

그 어떤 스크럽으로 얼굴을 비벼도

그 어떤 비싼 화장품을 처발라도 

그 어떤 변화를 감지할 수는 없었다.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대운(大運)이 들어온다는데 

전문가들은 대운의 징조를 알 수 있는 첫 번째로 늘 '얼굴색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주변 사람들이 말하는 '얼굴 좋아졌다'라는 표현을 허투루 들을 수 없는 이유다. 

낯빛이 우유나 복숭아 빛깔을 띠게 되면 확실한 징조가 된다고들 하지만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을지는 아직 확신이 서질 않는다.


차라리, 마스크 뒤로 얼굴의 절반가량을 가릴 수 있는 지금이 좋다고 말한다면

이 시국에 고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마녀로 지목되어 잔인하게 사냥을 당할 것이다.

'암세포도 생명이니 같이 살아야 한다'라는 막장 드라마 속 막장 대사와 다를 것이 없다.


지금의 상태를 요약하자면, 내 모습을 직접 확인하는 것에 심한 자기혐오를 느끼고 있다.

앞서 말한 스스로에 대한 긍정적 에너지와 전면으로 배치되는 극단적인 모습이다.

여하튼, 거울을 보거나 사진 속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 덮어버리기 바쁘다.

계속되는 권유에 친구와 사진을 찍거나 단체사진 속에 혹시나 하고 얼굴을 드리 밀면

같이 찍은 사람들의 얼굴빛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며 

곧바로 후회하고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심지어, 친구의 결혼식에 가서도 사진은 찍지 않는다. 

나의 어두운 외모가 사진을 망칠 것 같은 기분이 들거나 

그것을 보게 될 많은 사람들에게 놀림을 당할 것 같아 한 마디로 창피하다.


심각해 보이긴 하지만 극심한 콤플렉스로 인해 

대인기피증을 앓거나 깊은 우울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다.

햇빛에 얼굴이 더 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자를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모자 없다고 해도 이마를 훌러덩 까고 어디든 잘 다닌다. 

결국, 사람들은 나의 외모 따위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으면서 

마음속의 나와 지루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말 극복하고 싶은데 방법은 없는 것일까?


해답을 얻었다면 자랑스러운 성공담으로 공무원 시험에라도 합격한 양 

신나게 설명을 늘어놓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에겐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기에 결론에 도달할 수는 없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라는 것이다. 

계속해서 공을 들인다면 완전히 복구되진 않는다 하더라도

반드시 조금의 변화라도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다.


사실, 대운의 징조를 느낄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은 '얼굴색의 변화'지만

그 밖에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운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나의 경우에 빗대어 몇 가지를 살펴보자면

PD에서 주부로 직업이 바뀌면서 주변 환경이 급변했다.

그로 인해, 주변 사람들 역시 자연스럽게 물갈이 되었다. 

치열한 정글에서 나와 보니 세상을 보는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오랫동안 간직하고 있던 삶의 가치관이 변하고 마음이 안정되었다. 

안 하던 요리를 시작하거나 글을 쓰는 등의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있다. 

최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걷어내고 작은 일에서 큰 깨달음을 얻고 있다. 

나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귀인이 나타난다. 


실제로 기분 좋은 징조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으며

한 개의 부족함을 탓하기 보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한다면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집에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 보면, 잊고 있던 사건이나 장면들이 

갑자기 스쳐 지나갈 때가 많다. 

오늘은 고등학교 시절 연습장에 끄적거려놓은 짧은 자작 시가 떠올랐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나의 간절한 바람이 간절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지게 만들고 싶다면 

이루어질 때까지 간절해야 할 것이다. 


무슨 간절한 바람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이제 와서 생각나는 걸 보면,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무언가를 알려주는 것 같다.

하루를 행복하게 지금 같은 마음으로 천천히 나가다 보면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부정의 끝판왕인 검은 얼굴도 나아지리라 믿는다.

그것마저 아니라면, 적어도 하얀 마음은 가질 수 있을 것이다. 



P.S

웃자. 웃는 낯에 침이야 뱉겠느냐. 웃으면 복이 온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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