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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깽s Jun 21. 2021

글로 그리다

어린이 미술대회에 나가 금상을 한번 받은 적이 있다.

그 후부터 초등학교 시절부터 내 꿈은 당연히 화가가 되는 거였다.

그러나 잘하고 싶은 마음과는 다르게 항상 점수를 깎아 먹고 말았다. 그 바람에 미술 성적은 언제나 ‘미’.

손끝도 야무지질 않았고 꼼꼼함도 부족했으며 결정적으로는 타고난 재능이 없었던 탓이리라.

성적과는 관계없이 미술을 잘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가 보통은 만들기도 잘했는데 그런 감각을 가진 아이들의 재주가 어린 눈에도 신통방통했다.

처음으로 유화물감을 다루는 과정을 배우기 시작했을 무렵, 수채물감과는 다른 농도와 특유의 냄새가 나는 그것에 단번에 매료되었다. 거기다 캔버스 화포에 그림을 그린다니 얼마나 근사한가!

'나도 그 화포에 뭔가 하나쯤 남겨 볼 수 있을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자니 가슴도 덩달아 뜨거워졌다. 캔버스도 그렇거니와 유화물감도 싸지 않았지만 욕심을 부려 좋은 것들로 사고 말았다.

그리고 그즈음, 늦은 하굣길. 골목 초입에 버려진 나무 이젤을 발견했을 때의 그 희열이란!

어정쩡하게 기대어있는 이젤의 상태를 살필 겨를도 없이 그대로 주워 들고 집으로 내 달렸다. 그렇게 유화물감과 붓, 캔버스에 이젤까지 갖췄으니 구색만은 완벽해졌다.

날이 좋은 날을 기다렸다가 드디어 때가 된 그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옥상 엘 올랐다. 한쪽 다리가 절은 이젤의 다리를 흔들리지 않게 고정해놓고 밑그림을 그리려 손가락 액자를 파란 하늘에 띄웠다. 아직 차지 않은 바람이 불던 때였다. 그 바람 의결대로 눈에 보이는 익숙한 풍경들을 그리고 싶었다. 그러나 네모로 가둔 창 속에서 그려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간해내지 못했고 결국 그림은 시작도 되지 않았다. 소질이란 것은 내 의지와는 전혀 다른 것임을 깨닫는 수밖에 없었다. 캔버스와 욕심부려 산 유화물감들은 졸지에 사치품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났다. 그때 불어온 그 달큰한 바람결에 내가 그림을 완성했더라면..

그때의 아쉬움을 여전히 들춰보진 않았을 텐데...

더는 사치를 부리지 않고 그날의 풍경들을 다시, 글로 한번 그려내 본다면 어떨까.


키 작은 양옥집들이 오밀조밀 어깨동무한 작은 동네.

시원한 바람 속에 아직은 달고 짠 여름 끝내가 남아있다.

옥상마다 바람에 나부끼는 빨래들이 한가롭게 춤을 춘다.

빨랫줄에 걸린 빳빳한 수건에는 햇빛 냄새가 한 움큼 베었다.

지도 하나씩을 품은 이부자리들의 얼룩에 얼룩이 덧대어져 누런색 그라데이션을 이룬다.

빨간색 고추잠자리가 빨랫줄에 삼삼오오 앉아있는 옆으로 가만히 다가가 작게 입바람을 불어 본다.

띄엄띄엄 세 마리, 한꺼번에 뛰어 나는 듯하더니 사뿐히 도로 내려앉는다.

옥상 위 쓰다 남은 장판으로 얼기설기 못질된 너른 평상은 천덕꾸러기가 된 지 오래다.

짓궂은 아이들이 옥상을 타고 다니며 깨뜨린 장독 뚜껑들이 한쪽 끝에 포개어진 폼이 조신하다.

한참이나 비를 맞지 않은 장독 뚜껑들은 부옇게 회색 옷을 덧입고 있다.

고개를 들어 노을이 지려는 먼 하늘을 바라본다.

일요일 오후를 알리는 영도교회의 투명한 십자가에 빨간색 불이 켜진다.

지는 해의 긴 그림자가 교회에 비스듬히 눕는다.

4시를 알리는 교회의 빛을 시작으로 오르간 소리가 더해진다.

빛과 선율은 잠자코 동네를 채워간다.

속절없는 아쉬움이 밀려든다.

야속해진 손마디가 빨랫줄을 세게 튕긴다.

잠자코 앉았던 잠자리 여러 마리가 한꺼번에 아득해진다.

오후 4시의 투명한 빨간빛은 내 짙은 아쉬움과 함께 아직 저만치 있는 노을 속으로 섞여 든다.


오래전 선과 색을 입혀 캔버스를 채우진 못했지만 소소한 일상다반사를 빈 종이에 글로써 그려낸 본다면 어떨까. 어쩌면 내가 그리는 그림보다는 예쁠지도 모를 일이다. 밑그림조차 그려내지 못했던 그날의 작은 풍경화를 오늘 아주 조금은 그려낸 것일지도. 아직, 결코 멋진 그림은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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