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만에 대하여_최백호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_최백호]
*데뷔 40주년 기념앨범 [불혹] Version.
생일을 마흔 번 넘긴 지금에서야 (누군가 한 살 깎아준다고는 했지만) 이 곡이 쌉싸름한 달콤함으로 다가오는 것이 스스로 흥미로워 장르를 검색해본다. 답은 단번에 클리어하고도 명백한 ‘한국 트로트’.
트롯이라 이름하였을 때 떠오르는 쿵짝 스테레오타입에 이 곡을 가둬놓기 아깝노라 여겨지는 것은, 제목부터 낭만적인 무드가 흐드러지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조금 더 인생이 길어지고 또래 친구들이 트롯을 더욱 찾게 되는 날들이 오면, 그 속의 빈티지 가사들이 더없이 낭만스러울 날들이 오겠지만, 아직은 덜 익은 탓인지 오롯이 이 한 곡에서만 헤엄치고 있는 중이다.
시작하는 두 문장 안에서 단지 장소와 배경만을 설명했을 뿐이지만 나는 남성의 허한 눈빛과 마음이 느껴진다. 가사와 선율이 하나로 어우러질 때 곡이 가지게 되는 힘은 생각보다 크고 한계가 없다.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 짙은 색소폰 소리. 새빨간 립스틱, 마담.
선택된 단어들은 촌스런 고독함을 가득 담아내었는데, 이전 같으면 그저 재빨리 넘겼겠으나, 이제는 노래 가사가 들리는 것을 보니 스스로 신기하기도 멋쩍기도 하다. 이미지 속에 떠올려지는 이 중년 남성은 바바리를 걸쳤음이 분명하긴 하고.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그리움의 대상이 선명치 않더라도, 궂은 비가 내릴 때 떠올려지는 그 무언가에 대해선 너무나 알 것만 같다. 추억이든 사람이든 상황이든 시절이든, 그 감정에로 잠시 출입하는 행위는 나를 생기롭게 하기도 한다.
분명히 오지 않을 것임을 앎에도 기다리는 마음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의 가슴은 여전히 한구석이 허하고, 그 쌉싸름한 공허함은 절대 다시 오지 못할 것에 대한 것이지만, 고독과 허무함이 난무하는 남성의 깊은 그리움은 결국 낭만이라는 단어로 꽃피워진다.
다시 오지 못하는 것. 흐르는 시간 덕에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다시 못 올 모든 것들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적어도 이 노래를 깊게 경험한 나는 그것을 낭만이라 부르기로 했다.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