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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Aug 22. 2024

조금 이따 거기서 또 만나요

#오락실_한스밴드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가기 싫었어 열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어머 이게 누구야 저 대머리 아저씨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아빠
장난이 아닌 걸 또 최고기록을 깼어 처음이란 아빠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용돈을 주셨어 단 조건이 붙었어 엄마에게 말하지 말랬어
가끔 아빠도 회사에 가기 싫겠지 엄마 잔소리, 바가지, 돈타령 숨이 막혀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 시험성적 아신건 아닐

오늘의 뉴스 대낮부터 오락실엔 이시대의 아빠들이 많다는데
혀끝을 쯧쯧 내차시는 엄마와 내 눈치를 살피는 우리아빠
늦은 밤중에 아빠의 한숨소리 옆엔 신나게 코골며 잠꼬대 하는 엄마
가슴이 아파 무거운 아빠의 얼굴 혹시 내일도 회사에 가기 싫으실까
아침은 오고 또 엄마의 잔소리 도시락은 아빠꺼 내꺼 두 개
아빠 조금 있다 또 거기서 만나요 오늘 누가 이기나 겨뤄봐요
승부의 세계는 오 너무너무 냉정해 부녀간도 소용없는 오락 한판
아빠 힘내요 난 아빠를 믿어요 아빠 곁엔 제가 있어요
아빨 이해할 수 있어요 아빠를 너무 사랑해요


1998년도. 


시험을 망쳤어
오 집에 가기 싫었어
열 받아서 오락실에 들어갔어


하굣길마다 친구들과 함께 이 선율을 신나게 따라 불렀던 그 때의 우리는, 귀염 장하고 푸릇한 자매밴드 세 명과, 곡의 흥겨운 쿵짝 무드, 오락실이라는 장난스런 곡명에 단체로 속았었다. 이 곡에 가려져 있는 시리고 퍼런 애달픈 아픔을 말이다.


IMF즈음을 살아내던 아빠들과의 나이 갭이 크지 않은 지금에서야, 나의 딸과 나의 남편이 오락실에서 만나는 장면을 그려버린 지금에서야, 나는 이 곡이 깊이 아프고 서럽다.



시험을 망친 딸은 기분이라도 풀 겸 오락실에 들른다. 어맛, 엄청난 오락 실력을 보유하고 있는 아빠가 그 곳에. 같이 신나게 게임을 즐긴 후, 아빠는 딸에게 용돈까지 쥐어주며 입 단속을 시킨다. 특히 엄마에게는 아빠 본 것 비밀 또 비밀.


그날 밤.


아빠와 엄마, 딸 함께 거실에서 뉴스 시청 중. 요즘 아빠들이 오락실에 많다는 앵커의 이야기에 엄마는 혀를 쯧쯧 차고 아빠는 딸의 눈치를 살핀다. 한숨과 염려로 밤을 지새우는 아빠, 그리고 그러한 아빠의 모습을 알고 있는 딸. 다음날 아침 엄마가 싸준 도시락의 주인공들은 오락실에서 만나기로 무언의 약속을 한다. 끝내 딸이 아빠의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는 청자에게 알려주지 않은 채 아빠를 사랑한다는 말로 끝나는 곡.  


이 곡은 들을 때 마다 놀라운데, IMF라는 고통의 시기 남편들의 고뇌를 오락의 장소, 아빠와 딸의 사랑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다. 작사가는 누구보다 힘겨운 날들을 말 그대로 힘겹게 버티어내고 있는 그때의 남편들을 큰 마음으로 위로하고 싶었을 것. 그 힘듦을 알아차려주면서도, 내색하지 않고 신나게 오락을 같이 즐겨주는 딸을 등장시켜 고통 극복제인 '딸의 사랑'을 해학적으로 극대화 해냈다.  


단 하나의 아쉬움은, 곡에 등장하는 엄마의 일관적인 부정적 태도에 대한 부분. 거의 짧은 단막극으로 보아도 무방한 이 곡의 분명한 색깔을 드러내주기 위해서는 어둡고 짙은 인물이 응당 등장하여야겠으나, 동일한 역할을 보유하고 있는 나(아내이자 엄마)로서는 무심하며 돈만 밝히고 잔소리 폭탄인 아내가 못내 아쉽고 속상하다. 


모르긴 몰라도 동일한 상황이 펼쳐지는 날이 오면, 나는 남편의 실직 상태를 빠르게 눈치채고 살 궁리를 함께 모색하며, 힘없이 누운 뒷등을 꼬옥 안아주고, 아이들 앞 남편의 기를 우뚝 세워주고, 정성 그득한 편지 도시락을 싸드리는 어여쁜 아내가 되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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