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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악치료사 이원지 May 04. 2023

#낭만에 대하여_최백호

다시 못 올 것에 대하여.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에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나이가 들긴 했나보다.

마흔을 7개월 앞둔 지금, (아, 누군가 한살 깎아준다고 했던가.) 이 노래가 이토록 쌉싸름한 달콤함으로 마음에 들어오다니. 그래도 딱 한 영역만은 남겨놓았는데. 아직 트롯은 아니었는데...

이 노래는 트롯이라 이름하였을 때 떠오르는 어떠한 스테레오타입에 가둬놓기 아까운 곡이라고 여기며 "낭만에 대하여 장르" 검색, 정답은 단번에 클리어하게 한국트로트. 조금 더 인생이 길어지면,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들이 짧아지는 날들이 더욱 가까워지면 트롯 속에 들어있는 빈티지 가사들이 더없이 공감될 날들이 오겠지.


내가 생각하는 좋은 노래란 가사가 바탕이 된 장면들이 구체적으로 그려지는 곡이다. 가사로 인해 상상되어지는 장면들과 멜로디 및 곡 분위기가 적절하고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곡. 내가 좋아하는 곡들은 대체적으로 그 곡과 함께 갖는 나 혼자만의 추억이 있다. 그 기억 안에는 내가 가사를 통해 그려낸 내면 속의 장면과 음악, 그 곡의 무드가 흐른다. <낭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



"궂은 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새빨간 립스틱에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에게 실없이 던지는 농담 사이로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비가 굵게 내리고 있다. 주인공은 중년 남성.(주로 주인공은 그 곡을 노래한 사람과 성별과 나이대가 같겠지.) 그 남성은 짙은 색소폰 소리가 흐르는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잔을 시켜 테이블에 두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앞쪽에 앉은, 새빨간 립스틱으로 촌스럽게 멋부린 마담과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놓인 위스키를 한잔씩 들이키는 남성. 왜인지 모르지만 그 남성의 눈빛은 공허하고 엷은 미소 또한 제것이 아닌듯하다.>


_신기한건, 저 두 문장으로 이 남성의 허한 눈빛과 마음이 느껴진다는 것. 단지 장소와 배경을 설명했을 뿐인데. 이것이 바로 가사와 선율이 하나가 되었을 때 갖는 힘이다. "옛날식 다방, 도라지 위스키, 짙은 색소폰 소리. 새빨간 립스틱, 마담, 실없는 농담" 선택된 단어들은 촌스런 고독함을 가득 담아내었는데, 이전 같으면 오글거림에 그저 재빨리 넘겼겠으나, 이제는 이노래가 들리는 것을 보니 스스로 신기하기도. (아직도 약간은 낯간지러움이 남아있는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미지 속에 떠올려지는 이 중년 남성은 바바리를 걸쳤음이 분명하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실연의 달콤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이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중년의 나이에, 이제 와서, 그 때의 그녀를 떠올리는 것은 남성의 모든 현재 속에 새삼스러운 일이지만. 분명히 내 가슴은 잃어버린 것이 있고 비워둔 한 곳이 존재한다. 그것을 실연이라고 하던가. 지금 남성에게 실연을 떠올리는 것은 아프기도, 달기도 하다. 쌉싸름한 설탕 맛.>  


_너무나 알겠다. 그리움의 대상이 선명치 않더라도, 궂은 비가 내릴 때 떠올려지는 그 무언가에 대해. 그 것을 채울 수 있는 누군가는 이제 내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 그렇지만 추억이든 사람이든 상황이든 시절이든, 그 무드에 들어가는 느낌은 나쁘지만은 않다. 적어도 이 남성의 나이에는. 아프고 아팠던 시절들이 흐르고 지나 세월과 시간에 묻히고 덮여 반짝이는 알맹이만 남아있기에 그는 실연을 달콤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었겠지.

"밤늦은 항구에서 그야말로 연락선 선 창가에서 돌아올 사람은 없을지라도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첫사랑 그 소녀는 어디에서 나처럼 늙어갈까 가버린 세월이 서글퍼지는 슬픈 뱃고동 소릴 들어보렴"


<감감한 밤, 연락선이 드나드는 항구에는 뱃고동 소리와 파도 소리만이 가득하다. 바다를 바라보며 한참을 서있는 남성은 귀에 들려지는 소리들에 집중하며, 돌아오지도 않을 누군가를 기다린다. 세월이 이렇게도 흐르고 흘렀건대, 아직도 생생하기만 한 그녀는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지. 저 슬픈 뱃고동 소리만은 알고 있을 것임을.>

 

_분명히 오지 않을 것임을 앎에도 기다리는 마음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짧은 두 문장 속에 슬픔+서글픔+슬픔이 들어가있구나. 그는 슬프고 서글프고 슬프다.

 

"이제 와 새삼 이 나이에 청춘에 미련이야 있겠냐만은 왠지 한 곳이 비어있는 내 가슴에 다시 못올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놓여진 남성의 현재로서는 모든 것이 새삼스러울 수 있겠으나, 가버린 시간들 앞에 청춘을 떠올리며 미련을 두는 것조차 사치이겠으나, 비가 내리거나 늦은 밤 파도 앞에서 마음이 뭉근해지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다. 그의 가슴은 여전히 한 구석이 허하고, 그 쌉싸름한 공허함은 절대 다시 오지 못할 것에 대한 것이다. 허나... 고독과 허에 가까운 남성의 깊은 그리움은 결국 낭만이라는 단어로 꽃피워진다.>


_다시 오지 못하는 것. 그것이 기억이든 사람이든 시절이든 다시 못 올 모든 것들은 소중하고 아름답다. 적어도 이 노래를 깊게 경험한 우리는 그것을 낭만이라 부르기로 하자. :)



조용필, 신중현, 김도향, 최백호... 내가 그토록 사랑하는 머리 희끗한 분들. 나는 이 분들의 이야기를 노래와 가사로 듣고 싶다. 얼마 전, 조용필님이 펴낸 20번째 정규앨범에서 축적된 세월을 깊은 깨달음으로  대한 향기론 곡을 발견하여 작사 작곡을 확인하고는 적지 않게 놀랐다. 소위 말해 요즘 잘나가는 작사가의 작품이었던것. 나는 나보다 삶을 더 길게 마주한 선배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만나고 싶다. 최백호님께 고마운것 하나. 이 이야기는 오롯이 최백호님의 것이었다. 본인의 이야기이든, 상상 속 만들어낸 인물이든, 노래를 부르는 이와 노래 속에 존재하는 이, 그리고 가사를 만들어낸 이는 왠만하면 동일인물이기를 바라는 나의 그것을 살뜰히 충족시켜주셔서 감사로웠다.


덧. 이 곡은 정말이지 옛날식 다방과 야무지게 잘 맞아떨어지는 음색의 곡이지만, 현대스러움을 몇 방울 섞어 편곡된 버전이 있다. 곡에 등장하는 중년 남성보다는 살짝 어린 나는 이 버전으로 계속 청취하였으니 본인의 스타일에 맞게 들어보시라.


다시 오지 못할 것에 대하여. 낭만에 대하여.! cheers!


https://youtu.be/_RVe6kqlp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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