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 매장 폐업 후 수현은 뇌가 멈춘 채로 일주일 정도 지났을까...아들의 국제학교 학비를 착실히 모아 온 통장의 허무한 잔고를 보며
'어제까지 멀쩡했던 사람들이 이래서 죽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 사실 죽는 게 크게 두려울 것도 없는 수현이었다.
남편이야 워낙 잘나고 강한 사람이니 곧 새장가가서 잘 살 테고 외교관인 남동생도 워낙 또 잘나서 잘 살 테고 엄마 아빠야... 여동생이 먼저 갔으니 나까지 가면 너무 슬프긴 하겠지만...
수현 주위에 사람들은 다 착실한 사람들이었다. 친정 부모님도 남동생도 다 자기 앞가림하며 잘살고 수현의 남편도 수현의 시부모님들도 모두 크게 과소비를 한다거나 사고 치는 사람 없이 너무도 착실하게 잘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중에서 가장 돈도 없고 뭣도 없으면서 결국 자랄 땐 부모님 등에, 또 결혼해서는 남편 등에 빨대를 꽂고 이나라 저나라 각 곳의 다양한 것을 잔뜩 체험하고 눈만 하늘같이 높아져서는 자신의 취향이 하이엔드니 어쩌니 하면서 명품 편집샵을 떡하니 벌여 놓는가 하면....
어처구니없이 일 년도 안되어 쫄딱 망해가지고 그렇게 귀하다는 외아들 국제학교 학비까지 깡그리 말아먹으면서 결국 그 귀한 통장을 텅장으로 만든 그 여자, 자기 자신이 수현은 실로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던 것이다.
내가 이런 사실을 말하면 그들은 또 얼마나 비웃고 무시할까
"네가 그렇지 뭐."
"너 그럴 줄 알았다."
"돈 벌기가 그렇게 쉬운 줄 아냐?"
"달라고 하면 주니까 쉽게 버는 줄 알았지?"
등등
수현은 가족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될 경우 수현에게 쏟아 낼 각종 비난의 말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정말 그들이 평소 얘기했듯 뭐든 시작해도 결국엔 실패로 종결되는 운명인 것만 같은 자신이 너무 지긋지긋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아이를 위한다면서 국제학교 학비는 다 날려먹고, 그렇게 혼자 대학원을 가서 뭘 한다느니 어쩐다느니 꿈은 좌우지간 칭기즈칸이면서 대학원도 다니다 휴학해 버리고. 사업도 망했고 로스쿨도 학원 다니다 다리 부러지니 안 가고... '
생각해 보면 뭐 하나 진득하니 제대로 끝내서 성과를 본 것이 없는 자신이 버러지 같았고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현은 엄마에게 유독 스위트한 아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그 통장이 떠올랐고, 결국 그 통장을 다시 채워 놓아야만 이 흙탕물 같은 죄책감이 씻어질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친구가 괴롭힌다고 울면서 전화하던 아들의 목소리가 몇 년이 지난 후인 지금도 잊히지 않는데 영어유치원 친구 엄마의 말마따나 그나마 정민과 비슷한 성향의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더 많을 것 같은 국제학교로 기필코 옮겨줘서 하나밖에 없는 내 새끼 조금이라도 맘 편하게 학교 다닐 수 있게 해 줘야 그나마 맘이 좀 편할 것 같았던 것이다.
물론 국제학교에 간다고 무조건 아이가 좋아할 거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러나 최소한 비슷한 성공사례가 있으니 되든 안되든 일단 시도는 해봐야 되지 않을까
폐업을 하고 뇌가 가출한 채로 지내던 어느 날, 머리를 싸매고 누웠던 수현은 기필코 통장을 다시 채워 놓으리라 결심을 했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성희롱성 발언 있을 수 있음
그러나 크게 문제 되진 않을 정도
급여 높음. 그리고 힘 좀 쓰시는 여자분
여자 화장실 없을 수도 있음
주변 상가 이용 요망'
코로나로 지인이 사망하신 분들에겐 너무 죄송하지만 수현은 마스크를 쓰고 일하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 시국이 너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본인이야 저가 잘못했으니 아는 사람을 만나 망신을 당하든 말든 이젠 뭐 상관도 없으나 못난 엄마 만나 망신 당할 아들이나 독설을 뿜어내긴 하지만 징그럽게 나쁜 사람은 아닌 남편이 혹여 일 다니는 부인 때문에 민망할 상황이 생기는 것을 마스크 착용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어차피 신분 노출이 안된다면야 수현은 일의 종류를 지금 가릴 필요가 없었다.
수현은 무조건 보수가 높다는 일을 마구 찾았는데, 가족들 몰래 다니는 일이니 정기적으로 어딜 다닐 수는 없고 검색창에 '시급 높은 일'을 검색해 뭐가 되었든 '나쁜 일만 아니면 3D업종에 상관없이 이 한 몸 불살라 보리라.' 다짐했던 수현은 눈알이 빠지도록 밤새 찾던 와중에 위의 돈을 많이 준다는 건설 현장 여자 노동자 자리 구인글을 보게 되었고 근무 여건은 두 눈을 의심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과연 2023년 대한민국의 정상적인 일터에서 올린 글이 맞는 건지...
수현은 순간 몸이 오싹했다.
저런 건설현장엔 어떤 여자들이 가는 것일까
"성희롱이 있을 수 있다, 여자 화장실도 없다." 이렇게 대놓고 얘기하는데도 가는 사람들이 있으니 저렇게 구인글을 떡하니 올려놨겠지...
대략 20만 원 정도를 준다는 그 일은 5일만 일해도 백만 원을 손에 쥘 수 있으니 정말 돈이 급한 사람들은 연락을 할 것이고 결국 이 세상은 없으면 없을수록 더 안 좋은 상황으로 몰려 종국엔 더한 나락으로 떨어지기 딱 좋은 구조인 것이었다.
수현은 씩씩한 여자였다.
스스로를 외모만 여자지 속에는 장군이 살고 있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건 그냥 허세가 좀 있던 그녀가 멋져 보이고 싶어서 또는 한 번 웃자고 한 말이었고 사실 수현은 목소리만 컸지 겁이 많았다.
결국 건설 현장 여성 노동자 구인글에 간이 콩알만 해진 수현은 돈은 많이 안되지만 성희롱과 여자 화장실 부재 염려가 없는 파출부 일을 선택했는데 그 일의 시작도 쉽지는 않았다.
작심삼일作心三日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왜 생겼을까
그만큼 그 어떤 마음도 결심해서 유지하기가 인간이란 원래 쉽지 않다는 이야기 아닐까
그래 마스크로 얼굴은 가려진다 치자 그런데 수현은 수현 자신이 본인이 파출부 일을 나가는 것이 쉽게 용납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고심하던 수현은 얼마 전부터 열렬히 믿기 시작한 신에게 물었다.
하나님
제가 결심은 했는데요
파출부일을 나가는 게 제 자신이 너무 용납이 안돼요.
신은 수현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 일을 하면 안 되는데?"
"음.. 그게...."
수현은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고 있는데 신은 또 수현에게 물었다.
"너네 집에 일해주러 오던 여자들은 뱃속에서부터 파출부 운명을 타고난 사람들일까?"
"아니오."
"어쩌다 보니 그런 상황이 되어서 너희 집까지 왔겠지?"
"네...."
"그럼 너도 전혀 그런 일을 하던 사람은 아니지만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거 아냐?"
"그렇죠...."
"그런데 왜 너는 그 일을 하면 안 되는 거니?"
수현은 할 말이 없었다.
용가리 통뼈가 아닌 이상 우리 모두는 우리 앞에 다가오는 운명을 거스를 수 없다.
그렇다면 눈에서 레이저를 쏘면서 맞서 싸우기보단 변화에 순응하고 못이기는 척, 그 흐름에 한번 올라타보는 것이 더 현명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