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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arlotte Apr 08. 2022

기억이 추억이 되려면

나는 꽤나 겁쟁이다. 가까운 지인들을 제외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만큼 평소의 내 모습을 떠올리면 조금 어색한 면도 없지 않아 있지만, 알고 보면 걱정도 많고 겁도 많은 편이랄까. 스스로는 나름 간도 크고 손도 크고 통도 크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 무서워하는 것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가장 불편한 것 중에 하나는 고소공포증이다. 어렸을 때는 조금만 높게 올라가는 그네도, 시소도 무서웠고, 비행기를 타면서는 공간감이 느껴지는 고도에서는 창 밖을 보는 게 힘들었다. 물론 지금은 옛날이야기이지만. 그럼에도 아직까지 날 따라다니며 힘들게 하는 건 놀이기구, 고층 통유리 엘리베이터, 육교이다. 놀이기구야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그만인데 후자인 엘리베이터와 육교는 일상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들이라 한 번씩 불편하기도, 난감하기도 하다. 솔직히 엘리베이터는 밖을 보지 않고 가만히 서있기만 하면 돼서 크게 문제가 되진 않는데, 문제는 육교다.


뭐가 그렇게 무서운지, 무너지지 않을 것도 알고, 누가 나를 난간 밑으로 밀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도 그 위에 올라가면 들리는 온갖 소리들이, 유난히 거세게 느껴지는 촉감들이 그렇게 무섭다. 그래서 멀리 돌아가더라도 횡당보도로 건널 수 있는 곳이라면 육교를 포기하는 게 한때는 당연하기도 했었다. 다행스럽게도 매일 드나들어야 하는 회사와 집 근처에는 없어서 느낄새 없던 고소공포증을 갑작스레 느끼게 된 건 가장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였다. 일 년 전 이맘때 즈음 차 안에서 우연히 보게 된, 네모난 창문 안에 가득 핀 벚꽃과 빛나는 물결을 보러 나선 발걸음에 육교가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산책로와 가까워질수록 더 크게 보이는 육교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두리번거려봤지만 근처에는 횡단보도가 없는 듯했고, 무단횡단을 해서는 안되지만, 꿈에도 못 꿀 큰 도로였다. 대부분의 육교가 그런 곳에 있듯, 이곳도 그랬다.


10년 전만 했어도 멀리 되돌아가도 횡단보도는 분명 있을 거라며 다른 길을 찾아 나섰을텐데 이제 육교쯤은(?) 그냥 건널 수 있다며 마음을 부여잡고 계단을 올랐다. 싫어하는 것엔 불만이 당연히 많을 수 밖엔 없는 거겠지, 육교 특유의 높고 좁은 계단도 싫고, 낮은 난간도 싫다. 무튼, 이왕 계단을 올라온 거 그렇게 싫어하는 높은 육교를 건널 일만 남았는데도 발걸음이 쉽게 떼지질 않았다. 내가 내 모습을 보면서도 웃기는데, 정말로, 거짓말이 아니고, 맹세코. 육교를 건너면 식은땀이 난다. 이런 내가 예전엔 좀 창피했는데, 지금은 에라 모르겠다 싶은 마음으로 사는 요즘이니깐, 뭐 어때. 제일 웃긴 건 가운데로 조심조심 호흡을 잡고 걸어간다는 것. 지금 쓰면서도 헛웃음이 나는 일이다. 건너야 할 길을 눈앞에 두고는 생각보다 저 산책로에 벚꽃이 핀 것 같지도 않아 보이는데, 그냥 지나쳐온 공원에서 좀 쉬다 갈까. 하는 생각도 잠시, 그동안 혼자 여행을 다니며 직접 가보지 않고는 알 수 없었다는 나름의 기억을 더듬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역시나,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알 수가 없다. 건너기 전에는 보이지 않던 빛나는 강물과, 목욕하고 있는 새들, 그리고 곧 떨어질 것만 같이 풍성하게 핀 벚꽃들과 작지만 함께 한가득 피어있는 하얀 꽃들까지. 손에 가득 쥔 식은땀이 자연스레 부는 바람을 따라 사라지곤 어느새 미소만 입가에 남았다. 정말 별것도 아닌 내 소소한 변화들을 칭찬하며 또 새로운 것들을 보고, 느끼고, 간직하게 되는 이 순간이 좋았다. 이곳에 오면 내가 일 년 전에는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일 년을 보내왔고, 앞으로는 또 어떻게 살아갈 건지에 대한 생각을 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그저 흩날리는 벚꽃을 보려는데 옆에선 반짝반짝 강물이 빛났고 바람은 적당하게 불어 이 공간의 냄새를 충분히 맡게 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보이는 풍경을 그저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10년 동안 살긴 했지만, 부산이 어찌 됐건 타지이다 보니, 외롭거나 힘들 때 문득 부산을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는데, 또 내가 부산을 떠날 수 없는 이유가 하나 더 생긴 듯했다. 떠나면 너무나 그리워질 것만 같은 도시, 자연의 풍경을 잠시 빌려 힘을 낼 수 있는 곳. 아이러니하게도 등 뒤로는 커다란 화물차와 수많은 자동차들이 경적을 울려대며 바쁘게 지나다니지만 눈앞에는 이렇게 평화롭게 새들이 짹짹거리며 목욕하는 풍경을 볼 수 있는 도시.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도 모르는 것 투성이인 부산은, 나에게 이런 낭만을 선물해주는 곳이다. 바다를 좋아하는 내가 부산에 오랫동안 사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산과 들, 바다, 그리고 강,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이 가까이 머물러있는 곳이라 더욱더 떠나기 싫은 곳이기도 하다. 사람일은 알 수 없는 거니까, 평생 산다는 보장은 할 수는 없지만, 떠나는 그날까지 구석구석 가보지 못한 곳들을 여행 다니는 일 삼아 열심히 찾아다녀봐야겠다. 지나치면서 기억 속에만 머물렀던 풍경이 추억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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