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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금평 Oct 12. 2021

스님 원 딸라

인도 우타르프라데시주에 고대 코살라국의 주요 도시였던 쉬라바스티(shiravasti, sravasti)(*)라는 곳이 있다. 중국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大唐西域記)에 실라벌실저국(室羅伐悉底國)로 음역 되고 있는 지역이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스물다섯 해 남짓의 우기를 이곳에서 머물면서 제자들에게 원시불교 가르침의 7~8할을 설했던 곳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 불교가 특히 중요시하는 ‘공(空)’과 ‘연기’ 사상이 담긴 ‘금강경’도 이곳에서 설해졌다고 한다. 당시 부처님이 거처했던 곳은 제타바나(Jetavana), 사헤트(Sahet), 기원정사(祇園精舍)라고도 부른다.       


부처님은 기원정사에서 하루 한 번씩 1천여 명의 수행자들을 이끌고 동남쪽으로 1km 남짓 떨어져 있는 초승달 모양의 사위성(舍衛城, Mahet)으로 하루 한번씩 탁발(걸식)을 나갔다고 한다.     


2014년 봄, 나도 2천5백여 년의 시차를 두고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걸었던 들길을 따라 걸었다. 한쪽에서는 트랙터가, 그 옆에서는 볏단을 땅바닥에 두드리는 형식의 가장 원시적인 타작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아녀자는 소똥을 지푸라기와 버물려 저장용 연료를 만들고 있었고 야트막한 웅덩이에는 까만 소(버펄로)들이 한가로이 파리를 쫓고 있었다. 부처님 생존 당시의 쉬라바스티 인근 들판도 트랙터만 빼면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았으리라.          


“스님 원 딸라!”


얼굴에 땟국이 완연한 예닐곱 살 가량의 사내아이 하나가 2천5백 년 전을 걷고 있던 나를 깨웠다. 그동안 많은 성지 순례객들이 기원정사에서 사위성으로 이어진 이 길을 걸었을 것이다. 펑퍼짐한 황토색 생활한복을 입고 혼자 걷는 내 모습이 돈 잘 주는 한국 스님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선뜻 100루피 한 장을 건네주었다. 


우선 ‘스님’이라고 불러준 것이 고마웠다. 베트남, 태국, 스리랑카, 미얀마, 일본 스님들도 많았을 텐데 ‘스님’이라는 우리말을 배워 써먹는 모습 또한 기특했다. 기대했던 ‘원 딸라’보다 두 배 정도 후한 금액을 받아 든 아이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신이 나서 앞질러 갔다. 나도 저만 할 때 세뱃돈이나 공돈이 생기면 붕어빵이나 ‘라면땅’ 사 먹으로 몇 리 길을 멀다 하지 않았었지.......


어린아이 덕분에 진짜 스님처럼, 부처님을 따르는 1천여 수행자 중 한 명이 되어 여유롭게 걸었다. 정글로 변한 사위성, 마헤트 도성에는 수자타탑과 앙굴리 말라 교화 탑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발굴되어 있었다. 부처님께 기원정사를 제공했던 수자타 장자를 기리는 탑과 희대의 악인이었던 앙굴리 말라가 부처님께 교화되어 귀의했던 것을 기념한 탑이다.      


기원정사로 되돌아오는 길목에 그 사내아이를 다시 만났다. 이번에는 키가 좀 더 큰 사내아이와 함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서인가 싶어 알은체를 했더니 대뜸 “스님 원 딸라!”하며 두 아이가 합창을 했다. 꿔준 돈을 돌려달라는 듯 당당한 그들의 기세에 수행자의 여유는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아니 방금 전에 듬뿍 줬는데 나눠가지면 되지 무슨....... 짜식들, 내가 단 한 푼이라도 더 주는가 봐라!’ 굳게 다짐하며 못 들은 척 외면했다.         


한두 번 조르다 그치려니 했는데 두 아이는 들판을 가로질러 기원정사에 다다를 때까지 열 걸음에 한번 정도 “스님 원 딸라!”를 반복하며 따라왔다. 무심하지만 마음을 흔드는 소음에 수행자는 깜짝깜짝 놀라며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부처님과 수행자들이 소중한 한 끼 식사를 받아 들고 돌아오던 길을 내가 지금 걷고 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잊어먹고 말았다. 처음에는 ‘낯 두꺼운 아이들이 괘씸하다’는 생각에, 조금 지나서는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겠지’, 한참을 지나서는 ‘이 정도까지 달라고 하는데 줘야 하지 않나’하는 생각에 빠져있느라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가짜 수행자는 모처럼의 평화롭고 성스러운 길을 그렇게 걷고 있었다.       


결국 기원정사 입구에 다다랐을 무렵 ‘내가 졌다. 얄밉지만 그 정도 수고를 했으면 보상을 받을 만 하지’하며 지갑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돌아보니 두 아이는 이미 뒤돌아 걷고 있었다. 실망이 컸겠다 싶었는데 놀랍게도 그들의 뒷모습은 전혀 실망스러워 보이지가 않았다. 두 아이는 키 차이에도 불구하고 비스듬히 어깨동무를 한 채 조잘거리며 깡충깡충 신나게 걷고 있었다. ‘돈을 주고 말고는 당신의 일이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라오 가짜 스님!’하는 듯 ‘미련이 없는 경지’였다.      


돌이켜 보면 작은 아이는 친구를 데려왔으니 최소한 나눌 줄 아는 아이였다. 이미 자기는 맛난 것 사 먹을 돈을 확보한 만큼 친구에게 “만만한 촌놈이 하나 왔다”며 “밑져야 본전이니 너도 한 번 달라고 해봐!”했을 것이다. ‘만만한 촌놈’이 아니고 ‘점잖은 수행자’로 소개했을 수도 있다. 돌아서는 발걸음이 거리낌 없었던 것은 잠시 미뤄두었던 축제가 다시 시작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고 축제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좋았을 것이다. 

     

가짜 스님, 가짜 수행자가 머뭇거리고 있는 동안 아이들은 점점 멀어져 갔다....... ㅠㅠ      

자세를 가다듬고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낼지니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머무르는 곳마다 주인이 되면 서있는 그곳이 참된 자리이니라), 방하착(放下着, 집착을 내려놓으라)”하며 여기저기서 주어 들은 풍월을 읊고 있었지만 때는 늦으리.        


아놔......!     


신이나서 걷던 두 아이의 뒷모습이 좀처럼 잊히지가 않는다. 

그날, 나는 2천5백 년 후에 환생하여 탁발 중이던 부처님과 수행자를 매몰차게 외면하고 말았다.           


(*) 쉬라바스티(shiravasti, sravasti)

고대에는 나라 이름과 수도 이름이 같은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 ‘신라’와 ‘서라벌’의 기원과 관련해 김병기, 양주동 선생님 등의 추론을 바탕으로 잡설을 하나 보태 본다. 불교국가 ‘신라’ 사람들은 나라와 수도 이름을 부처님이 살았던 나라(佛國土) ‘쉬라바스티’에서 따온 것 같다. 한자로 된 나라 이름은 ‘쉬라바’(Shrava)를 음차 한 ‘室羅伐’에서 ‘室’을 ‘새로움(新)’으로 대체하고 ‘伐’을 버린 형태의 ‘新羅’로, 우리말 이름은 ‘室羅伐’의 중국발음을 따오는 과정에서 ‘서라벌’이 된 것이 아닐까 상상해 본다. ‘서라벌’이 나중에 ‘서울’로 발전한 것이라면, ‘서울’이라는 말은 결국 할아버지뻘인 인도의 ‘Shiravati'에서 유래하게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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