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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혜진 Jun 22. 2022

커다란 눈알이 붙어도 에르메스다.

(에르메스 vs. 눈알가방)

평소 편안하고 부담 없는 패션을 즐겨하는 나로서는 격식 있는 자리나 모임은 항상 걱정과 근심을 가져왔다. 옷과 신발은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지만 가방은 내가 선택한 옷과 신발에 어울려야 할 뿐만 아니라 여성의 패션 중에서 가장 시선이 집중되는 아이템이기에 고민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평소 즐겨 들고 다니는 가방들은 내가 정한 조건들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아이패드가 들어갈 정도의 크기와 가벼운 소재, 어디에 두어도 마음 편한 부담 없는 가격'이라는 불변의 조건들과 함께 가방을 들었을 때 느껴지는 '설렘'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격식 있는 자리나 모임을 떠올리는 순간 이러한 조건들을 갖춘 내 가방들은 작고 왜소해 보이고 순간 고가의 유명 브랜드들이 하나둘씩 내 머릿속에서 맴돌기 시작한다. '이 중 가장 저렴한 것이라도 구매할까?' 하는 충동적인 생각과 함께 '평소 들고 다니지 않을 가방에 투자할 수 없다'는 개인적 신념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지금까지는 후자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싸움이 계속되는 것을 보면 고가의 유명 브랜드가 주는 '설렘'의 강도가 내가 정한 '불변의 조건들'을 무너뜨릴 정도로 세다는 것은 무시할 수 없는 현실이다.


<에르메스 vs. 눈알가방의 싸움>


적당한 크기와 가볍고 부담 없는 가격이라는 '불변의 조건들'과 '설렘'은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 같다. 불변의 조건들이 완벽하게 충족되는 가방은 마치 시장가방을 들었을 때처럼 설렘을 느낄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불변의 조건들'과 '설렘'을 모두 충족시킬 가방은 없는 것일까?


이러한 소비자의 고민을 잘 아는 디자이너가 있었던 것 같다. 디자이너 A는 많은 사람들이 고가의 유명 브랜드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값비싼 물건에 구애받지 않고 패션 본연의 즐거움을 회복시키는 상품을 개발하고자 하였다. 이에 ‘Fake for fu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패션을 가지고 더는 놀 수 없을 정도로 신나게 놀아보겠다’는 역설적인 의미로 ‘플레이노모어(PLAYNOMORE)’라는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어린 시절 가지고 놀았던 인형과 만화를 떠올리며 ‘보석 같이 반짝이는 커다란 눈알’을 창작하고 이를 ‘버킨백' 및 '켈리백' 스타일의 인조 가죽 가방에 부착하였다. 디자이너 A가 제작한 위 가방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눈알가방'으로 불려졌고, 연예인들이 패션 소품으로 사용함으로써 인기를 얻게 되었다.



이에 에르메스는 디자이너 A를 상대로 '눈알가방'의 제조 및 판매 금지 등과 함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다. 그 이유는 에르메스의 버킨백, 켈리백과 동일한 형태의 가방에 커다란 눈알을 부착한 것은, 에르메스가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든 성과인 가방 형태를 무단 사용하여 에르메스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부정경쟁행위라는 것이다.


<이해의 길잡이>

부정경쟁방지 및 영업비밀보호에 관한 법률 제2조 제1항 파목은 '타인의 상당한 투자나 노력으로 만들어진 성과 등을 공정한 상거래 관행이나 경쟁질서에 반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영업을 위하여 무단으로 사용함으로써 타인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를 '부정경쟁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특허법, 상표법, 디자인보호법 등에 의해 보호받을 수 없는 경우더라도 위 법률 규정에 따라 타인의 성과를 무단으로 사용하여 그 경제적 이익을 침해하는 경우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하여 손해배상과 금지청구를 구할 수 있다.


<누가 이겼나?>


제1심 법원은 디자이너 A가 에르메스의 버킨백, 켈리백과 동일한 형태의 가방에 자신이 창작한 커다란 눈알을 부착한 것은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한다고 보아 에르메스의 청구를 받아들였고, 이에 디자이너 A가 항소하였다.


제2심 법원은 제1심과는 달리 에르메스의 청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1) 디자이너 A는 'Fake for fu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값비싼 물건에 구애받지 말고, 패션 본연의 즐거움을 회복하자'라는 가치를 전달하기 위하여 에르메스 형태의 가방 전면에 커다란 눈알을 부착함으로써 새로운 심리감과 독창성을 구현한 것이고, 2) 디자이너 A의 '눈알가방'은 커다란 눈알을 가방 전면에 부착하고 저렴한 인조가죽과 반짝이는 스팽글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소비자들이 에르메스 가방과 혼동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이다. 이에 에르메스는 대법원에 상고하였다.


대법원은 제2심과 달리 에르메스의 청구를 받아들였다. 그 이유는 1) 에르메스 가방의 형태는 에르메스의 상품의 출처로서 식별력이 인정되므로 '법률상 보호할 가치가 있는 이익'에 해당하고, 2) 눈알가방은 소비자들이 에르메스 가방과 혼동할 가능성이 있고 에르메스 가방의 희소성과 가치를 저하시켜 에르메스의 경제적 이익을 침해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이너 A가 에르메스 가방 형태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것은 공정한 경쟁질서에 반하여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승패 이유는?>


[에르메스의 철학과 가치]


에르메스는 1837년 티에리 에르메스(Thierry Hermes)가 만든 브랜드로 처음에는 말안장이나 마구 용품을 제작하여 판매하였다. 말안장이나 마구 용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견고한 바느질이 무엇보다 요구되는데 이를 위해서 장인이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는 '새들 스티치(saddle stitch: 말안장 바느질)' 방식이 사용되었다. 에르메스는 가방을 제작하는 데 있어서도 여전히 새들 스티치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숙련된 장인이 에르메스 버킨백과 켈리백을 만드는데 48시간이 소요되므로 매년 한정된 수량만이 판매되고 있고, 그 가격 또한 1500만 원에서 2억 원대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량이 한정된 관계로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제품이다. 버킨백과 켈리백을 구매하기 위해서는 에르메스 스카프, 그릇, 지갑 등 다른 아이템을 일정 금액 이상 구매한 실적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구매 실적이 있더라도 내가 방문한 매장에 내가 원하는 가방이 있어야만 구매할 수 있다.


에르메스 가방의 무엇이 소비자들을 갈망하게 하는 것일까?


그 해답은 '장인정신'에 있을 것 같다. 숙련된 장인은 최상품의 가죽으로 자신의 최고의 기술을 가방에 담아낸다. 최고의 제품을 만든다는 신념이 있을 뿐 생산량은 고려하지 않는다. 결국 제품의 '고품격'과 '희소성'은 자연스레 따라오게 된다. '고품격'과 '희소성'은 더욱더 소비심리를 자극하고 결국 가격 상승을 가져오게 되는 것이다.


[눈알가방의 철학과 가치]


이와 같이 철저한 '장인정신'으로 '고품격'과 '희소성'을 추구하는 에르메스에게 있어서 '눈알가방'은 어쩌면 굉장히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던 것 같다.


'눈알가방'은 값비싼 물건에 구애받지 않고 패션 본연의 즐거움을 회복시키 위해 ‘Fake for fun'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패션을 가지고 더는 놀 수 없을 정도로 신나게 놀아보겠다’는 철학과 가치를 가지고 있다. 버킨백과 켈리백 외형을 모방하되 저렴한 인조가죽에 기계식 박음질을 사용하고 가방 전면에는 반짝이는 스팽글로 만들어진 커다란 눈알을 부착한 '눈알가방'은 에르메스가 가지는 위와 같은 철학과 가치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눈알가방'의 철학과 가치는 가수 장기하의 '부럽지가 않어'라는 노래를 떠올리게 한다.


['부럽지가 않어' 에르메스 패러디]


[에르메스의 승리 이유는...]


에르메스를 아는 소비자들이 눈알가방이 버킨백과 켈리백의 형태와 유사하다고 하더라도 이들을 서로 혼동할 가능성이 있을까?


에르메스와 눈알가방의 철학과 가치는 확연히 차이가 있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하여 고품격과 희소성을 추구하는 버킨백, 켈리백과 저렴한 인조가죽에 반짝이는 스팽글로 만든 커다란 눈알이 부착된 '눈알가방'은 혼동의 범주 안에 포함시키기는 어려울 것 같다.


또한 버킨백과 켈리백은 고품질의 제품으로 1500만 원에서 2억 원대 가격에 유명 백화점에서 구입 가능한 반면, 눈알가방은 10만 원에서 20만 원 상당의 가격에 일반 가방 매장이나 인터넷에서 구입 가능하다. 안타깝게도 어마 무시한 가격의 차이는 버킨백과 켈리백을 살 수 있는 수요자층과 눈알가방을 살 수 있는 수요자층을 나누게 된다.


소비자들이 버킨백과 켈리백을 사려고 했는데 혼동하여 10만 원에서 20만 원 상당의 눈알가방을 구매하는 일이 발생할까?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올법한 사건일 것이다.


그러면 에르메스가 제2심의 판단을 뒤엎고 대법원에서 승리한 이유는 무엇일까?  에르메스의 철학과 가치에 답이 있는 것 같다.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에르메스는 고품격과 희소성을 그 핵심 가치로 삼고 있다. 에르메스는 버킨백과 켈리백이 갖는 이러한 핵심 가치가 눈알가방에 의하여 훼손됨에 따라 에르메스의 경제적 이익이 침해된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고 입증했고 이를 대법원에서 받아들인 것 같다.


어쩌면 에르메스의 강력한 경쟁 상대는 샤넬이나 뤼이비통이 아닌 자신의 핵심 가치를 위협하는 눈알가방이었을지 모른다.


아쉬운 점은 '눈알가방'의 패러디와 풍자가 고품격과 희소성을 추구하는 '버킨백'과 '켈리백'에는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불변의 조건들'과 '설렘'을 모두 충족시킬 가방이 나오길 희망하면서... 서로 다른 철학과 가치를 인정하고 새로운 도전을 응원하는 문화 창조 사회를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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