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 - 못
키 작은 여자아이가 갈색 가방을 메고 학교를 나선다.
시장통을 지나 언덕을 올라
'사거리 상회'를 거들떠도 안 보고 지나간다.
단풍잎 만한 손에 종이 한 장을 꼭 쥐고서.
선생님께서 말씀하셨을까
엄마 아빠께 꼭 보여드려라.
나는 어떻게 읽고 쓰기를 배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유치원도 다니지 않았고, 그렇다고 집에서 누가 글자를 가르쳐주지도 않았다. 돌봐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 6월 생인데도 나는 7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최근 눈물 질질 짜며 보았던 어떤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아주 어려운 환경에서도 100점짜리 시험지를 받아와 엄마의 가슴을 애끓게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놓아버리고 싶은 삶을 움켜쥐게 하는 단단한 이유가 되기도 했을 것이다.
나의 경우는 그 반대였다. 학교에 들어가기는 했지만 아마도 무엇을 배운다기보다 놀다 오는 곳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0점짜리 시험지를 흔들며 집에 왔다고 했다. 그리고 "빵점을 맞았으니 빵을 사달라"라고 했다며 아버지는 나를 놀리곤 하셨다.
한국어 학습 1단계는 일상생활에서 흔하게 쓰이는 낱말을 모으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결어미나 종결어미는 언제나 힘들지만, 쉬어가는 순간이 '- 안 하다'와 '- 못 하다'를 배우는 시간이다. 고향에서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순간이기도 하고. 남편에 대한 이야기,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한국 생활이 힘들지는 않은지 피상적이나마 들여다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베트남에서 온 그녀는 이제 20살, 아직 젖살이 다 빠지지도 않았는데 어른 행색을 하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곱게 빗어 넘겨 핀으로 고정하고 언제나 단정하고 정돈된 모습으로 나를 맞았다.
소리가 잘 들리지 않아 보청기를 끼며 생활하는 목소리 큰 시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고, 입덧이 아직 끝나지 않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베트남에서는 결혼을 하고 출국을 하려면 한국어 기초실력 테스트를 통과해야만 한다. 그래서 도시로 나가 기숙사에 머물며 학원을 다니기도 한다. 그녀는 100점을 맞았다고 했다. 그래서 레벨테스트를 하고 1단계 9 과부터 시작을 했다. 예습도 열심히 하니 습득이 빨랐다. 따로 책을 구해 남편과 공부도 하는 것 같았다. 진도는 빠르게 나갔다.
그녀의 남편은 시간에 맞춰 전화를 해서 점심은 먹었는지, 선생님은 오셨는지, 공부는 잘했는지를 물었다. 처음 연계를 할 때 내가 제시한 시간이 점심을 먹어야 하는 시간이고, 아내가 식사를 잘 못해서 점심시간에 꼭 점심을 먹어야 한다면서 시간을 조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내 생각은 "하루 종일 집에 있는데, 12시에 시작하는 것과 1시에 시작하는 것이 크게 다를까?!" 싶었지만 요구에 맞춰주었다. 남편의 SNS 프로필에는 '나의 사랑하는 아내, 죽을 때까지 우리 사랑하며 살자."라고 쓰여 있었다.
한 달쯤 지났을 때 입덧도 좀 가라앉은 것 같고, 매일 집에만 있는 것 같아서 동네 작은 도서관에 안내를 했다. 아기 배냇저고리 만드는 것 같은 소모임을 하면 좋을 것 같았다. 회원가입 하는 것을 도와주고 집에 돌아왔다.
30분쯤 걸린 것 같았는데, 시어머니가 현관에서부터 소리를 질렀다. 중구난방, 중언부언 언성을 높였는데 요약하면 자기에게 "얘기를 하지 않고 나가, 놀라서 아들에게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다음 시간에 도서관에 가봅시다."라고 예고를 했고, "도서관에 다녀올 거예요."라고 남편에게 알렸다고 했는데 시어머니가 몰랐다는 것이다. "자기에게 얘기를 안 하면 자기가 뭐가 되느냐?"였다.
그녀는 몸을 움츠리고 한쪽으로 비켜서 있었다.
그녀의 시어머니는 보청기도 끼지 않고 본인 할 말만 내뱉고 있었다. 아들과 통화를 했으니 자초지종을 알게 되었을 텐데도, 알아듣지도 못하는 그녀에게 - 혹은 나에게 - 화풀이는 해야 하는 거였다. 우선 보청기를 끼게 하고 다음부터는 미리 잘 말씀드리겠다고, 밖에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고 여러 차례 반복하여 진정을 시켰다.
그녀의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하지만 그녀는 남편과 전화로 대화할 만큼 한국어를 할 수 없었다.
"공부해요."
"내가 지금 갈게. 40분쯤 걸릴 거야."
임신 중에 발생하는 서운한 일은 두고두고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녀는 시어머니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을 수도 있고, 그날의 일을 평생 잊지 못할 수도 있다.
그녀는 울었다. 나이답지 않게 언제나 단정하고 예쁜 말만 하던 그녀가 울었다. 현관에 깨끗한 실내 슬리퍼를 가운데 놓고 선생님을 기다리던 그녀가 울었다.
주말에 남편과 나들이라도 나가려고 하면 동네 공원이나 걸으면 되지 애 힘들게 뭐 하러 멀리 가냐고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많이 돌아다니라고 했었다. 버스, 지하철 등 대중교통도 이용해 보고, 경복궁, 남대문도 가보고 여건이 되면 기차를 타고 먼 곳도 가보라고.
그렇지만 나이 들어 남편과 별거 중인 시어머니 생각도 해야 했다. 나는 번역기를 동원하여 한참 동안 시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이야기를 했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파서 그렇다. 우리는 모두 아프면 화가 난다고 말이다. 이제 20년 밖에 살지 않은 그녀가 내 말을 이해한다고 했다.
결혼제도가 생긴 이래 고부간의 갈등이 계속되어 왔을 것인데, 아직도 그 적절한 해결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요즘은 많이 달라진 것 같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시어머니의 외국인 며느리에 대한 핍박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사람이 어떻게 사람에게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경우도 있었다.
마음이라는 것이 뜻과 같이 움직이지 않고 자꾸 괴로운 생각이 올라오니 분출을 해야 속이라도 후련해지는 것일 게다.
그러나 '하느냐, 안 하느냐'와 '할 수 있느냐, 못 하느냐'의 차이는 몹시 크다.
그녀는 남편의 관심과 애정으로 작은 어려움은 이겨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좀처럼 웃지 않는 그녀의 마음에 그 남편의 표현이 적절하게 가 닿는 것인지, 얼마나 지속될 것인지, 그녀는 지속적으로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을지 그때의 나는 알 수 없었다.
바닷가의 조약돌을 그토록 둥글고 예쁘게 만드는 것은 무쇠로 만든 정이 아니라 부드럽게 쓰다듬는 물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