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살 때 주머니가 있는지 꼭 확인한다.주머니 있는 옷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재킷이 던 바지 던 치마 던 나는 주머니가 있어야 안정감이 든다. 딱히 무얼 넣고 다니는 건 아니고 주로 손을 넣고 다니는데 어쩌다 주머니 없는 옷을 입으면 손 둘 바를 몰라 어색하다.
언젠가 유행이 지나 안 입던 재킷 주머니에서 지폐 몇 장을 발견하고 하루 종일 비실비실 웃었던 일이 있다. 그 후로 나는 종종 철 지난 옷들 주머니 속에 일부러 지폐를 넣어 놓곤 하는데 이때 중요한 건 돈을 넣은 걸 까맣게 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우연히 찾았을 때 생각지 못했던 행복을 맛볼 수 있다. 또 돈뿐 아니라 주머니 속에서 오래된 영화표나 영수증들이 종종 나오는데 그럼 그때 그 시간 함께했던 얼굴이 울컥 떠오르기도 해서 추억에 잠시 잠긴다.
봄에 심은 나팔꽃과 채송화 꽃씨도 일 년 전 산책길 화단에서 주워 주머니에 넣어놓고 잊어버리고 있다가 뒤늦게 발견하고 심은 것이다. 주머니 속에는 참 많은 추억이 담겨있다. 추웠던 겨울 남편의 주머니 속에 손을 넣고 뜨거운 손을 잡고 걸었던 일도 어릴 적 오랜만에 놀러 오신 친척 어른이 주신 용돈을 사양하자 주머니에 쿡 찔러주시던 일도 이제는 내가 그분 들을 만나면 아니라고 사양하시는 어른들의 주머니에 용돈을 꾹 넣어드린다,
내 주머니를 채우는 것보다 남의 주머니에 나누어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깨달으며 나이 들어가는 오늘이 참 감사하다.
그런데 주머니 속에 꼭 보물만 있는 건 아니다 뜻하지 않게 비밀이 들통나기도 한다. 딸의 방을 정리하다 옷장 깊숙이 구겨져 있던 옷 주머니에서 남자 친구와 너무나 다정히 찍은 스티커 사진을 발견했다. 딸은 여태 한 번도 남자 친구가 있다고 말한 적이 없었고 딸에게 남자 친구가 있다는 게 나도 남편도 놀랍고 생경한 일이었다. 그날 저녁 딸이 집에 오자마자 주머니에서 찾은 사진을 들이대며 한참을 추궁했고 남자 친구가 지금은 군복무 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머니 속에는 이렇게 놀라운 비밀도 숨어있다.
오래전 도시락에 편지를 넣어 마음을 전하는 ‘도시락 편지’라는 이야기가 베스트셀러인적이 있었다. 나는 그때 ‘주머니 쪽지’를 생각하며 예쁜 메모지에 마음을 담은 응원의 글이나 다투고 난 뒤 화해의 메시지를 주머니에 몰래 넣어놓곤 했는데 매우 반응이 좋았다. 요즘 우리 아이들은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 잔소리로 들어서 오해가 쌓이고 마음이 상한다. 갱년기여서 그런지 나의 목소리 톤도 곱지 않을 때가 많다. 그래서 촌스러운 옛날 방식이지만 가끔이라도 아이들이나 남편에게 ‘주머니 쪽지’로 마음을 전해볼까 한다.
각종 SNS가 홍수를 이루는 디지털 세상에서 ‘주머니 쪽지’가 단비처럼 시원하고 수박처럼 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쪽지를 쓴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엄마가 혼자 청소하기 너무 힘든데 각자 자기 방 청소는 알아서 하면 좋겠다. 특히 딸 옷장에 입었던 옷 처박아 놓지 말고 빨래 통에 담아라! 그리고 오늘 욕실 청소해 준 아들 고맙다~~~ ”
“사랑하는 남편님 반찬 투정하지 않고 아무거나 잘 먹어줘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냉장고에 남은 음식들 쓰레기 된다고 잔소리 좀 하지 말아 주시면 더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