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 속 화수분에 빠져버린 눈
이제 연수원에서 합이 잘 맞았던 동기는 B와 연이 밖에 남지 않았다. 나이 많은 그룹 중 2명 밖에 남지 않았다. 동기 B와의 대화가 요즘 부쩍 많아졌다. 어려운 일이 있으면 꼭 말하라고 도와주겠다고 했지만, 사실 연이 역시 업무가 서툴기 짝이 없었다. 업무를 하나하고 돌아보면 10개가 쌓여 있었다. 열심히 처리하고 2개가 남아 있던 상황에 집에서 나머지 2개를 처리하려고 보면 다시 10개가 되어 있었다.
동기 B 역시 이와 같은 화수분을 토로했다. 연이는 돈이 나오는 화수분이라면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겠지만, 일이 한 만큼 채워지는 화수분이라면 절대 사양하고 싶었다. 그런데, 동기 B와 연이는 후자의 화수분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10월에 온 동기라고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저 쌓이는 업무를 처리하느라 급급했다. 집에 돌아와서도 밥을 먹으면서도 남은 업무를 어떻게 할지에 대한 머리 굴리는 소리가 났다. 달그닥달그닥.
새벽 3시에 깬 연이는 EVPN에 접속해 있다. 화장실을 가던 어머니가 이 광경을 목격하고는 연이를 불러 앉혔다. 쾡한 눈은 초점이 없었다. 연이는 일과 일 사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아무말없이 꼭 안아주셨다. 잠시동안 연이는 평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어김없이 알람소리는 연이를 침대밖으로 밀어냈다. 계속 졸린 듯한데 잠을 편히 잘 수는 없었다.
어릴 적 꿈에 끝나지 않은 떨어짐을 경험한 적이 있었다. 어디 잡을 데도 없고 그 끝없이 떨어짐에 심장은 터질 것 같고, 허리를 꺾여서 버둥대면 댈수록 통증만 더할 뿐인 상황. 그게 지금인 것 같은 느낌은 왜일까? 멍하니 컴퓨터를 보다가 깜빡 졸았는지 다시 눈을 뜨고 있었다. 대화창이 윈도우 작업표시줄에서 연이의 클릭을 기다리며 깜빡이고 있었다. 동기 B였다.
"연이님, 이번 주말에 잠시 우리 학교로 와줄 수 있어요? 급해서 그래요."
B의 다급함이 대화창을 뚫고 연이에게 전해졌다. 동기 K가 생각났기에 연이는 자신의 급함을 일단 제쳐두고 가겠다고 했다.
동기 B의 이야기
지도앱에서 B가 근무하는 학교를 찾아봤다. 전철역에서 내려서 경찰서를 끼고 100미터만 직진하면 있는 다소 교통편이 좋은 곳에 있었다. 연이가 다니는 OO초등학교로 가는 시간의 절반도 안 되어 도착했다. B에게 전화를 걸었다. 1번 울리고 바로 받은 B는 아침 일찍부터 초과근무를 하고 있었다. 학교는 옛날에 지어진 학교라 연이가 근무하는 학교에 비하면 참 아담했다.
오히려 연이는 초등학교를 생각하면 B가 근무하는 학교가 생각날 정도로 오래 전에 학교를 다녔구나 하는 연이의 추억속에 있는 학교와 많이 닮아 있었다. 교문을 지나 한참을 걸어들어가자 4층짜리 초등학교가 나왔다. 연두색, 하늘색, 노랑색, 다홍색이 교대로 초등학교를 색칠해져 있었다. 연이가 학교의 중앙현관인 것 같은 곳으로 다가가자 B가 마중나왔다.
반가히 맞이하는 B의 눈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아주 낯익은 눈을 발견했다. 입꼬리를 애써 올리며 연이를 맞이했지만, 어깨는 축 쳐져있었다. 행정실로 안내하는 B의 뒷모습이 터덜터덜했다. 행정실의 교실 반칸정도의 아주 작은 공간에 실장, 차석, 삼석인 B, 사회복무요원이 있던 자리. 이렇게 네 자리가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사회복무요원이 있었던 자리는 얼마나 비어 있었는지 먼지가 뽀얗게 앉아있었다. 흡사 미세먼지가 많은 날 차에 아주 얇게 먼지를 도포한 듯 사회복무요원 책상은 오랫동안 비어 있었다.
몇 시간째 끙끙 앓았는지 B의 자리는 서류가 책상을 뒤덮고 있었다. 연이도 이 서류 저 서류 보느라 그랬는데, B라고 다를 게 없었다. B의 고민은 연이와 다르게 급여에 있었다. 연이가 근무하는 학교에 없는 직종에서 문제가 터졌다. B가 내민 자료를 보니 분명 뭔가 잘못 되어 있었다. 첫 월급을 주고 나서 찾아온 근로자는 급여가 이상하다며 B를 여러 차례 곤경에 처하게 했다고 했다. 실장님도 차석도 처음에는 신규라서 그러려니 B를 다독여 줬지만,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악화되기만 했다.
실장님도 차석도 도와줄 수 없는 영역이라 B는 하루 이틀 밤을 새우다보니 어느새 잠을 잘 수가 없다고 했다. 그렇게 며칠째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B는 해결하지 못하고 연이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 머리를 맞대고 B와 연이는 어느 정도 해결을 했다.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며 B는 뭐 좀 먹자고 했다. 그렇게 두어 시간이 지나 행정실을 나와 근처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다.
B와 이런 저런 연수원 때 얘기를 나누니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 불과 많이도 아니고 몇 개월 전 얘기인데 B도 연이도 한참 지난 오래전 얘기를 꺼내듯 했다. 식당을 나와 연이는 B가 흔드는 손에 맞장구치듯 손을 흔들며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