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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이 Aug 19. 2021

[교행일기] #45. 쌓여만 가는 세 번째 서랍

쌓여만 가는 세 번째 서랍


처음 발령 받았을 때 첫 번째 서랍에는 필기구가 있었고, 두 번째 서랍과 세 번째 서랍에는 비어 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서랍에는 중요서류 중 처리할 것들을 넣고, 세 번째 서랍에는 놔둘 게 없어서 서류 중에 이 서류가 버려도 되는 서류인지 모를 그런 서류들을 넣어두었다. 하나 둘 씩 놓아두기 시작한 게 벌써 가득 차려 했다.


언제까지 미뤄둘 수만은 없었다. 결국 저 많은 서류들은 연이가 남겨둔 처리하지 못한 일들의 일부였다. 연이의 마음과 같이 묶여 있던 퀘퀘묵은 서류였다. 서류를 몽땅 책상 위로 얹어놓고는 현재 분류할 수 없는 것과 분류할 수 있는 것 중 필요한 서류와 버릴 서류 이렇게 3가지로 분류를 시작했다. 분류할 수 없는 서류가 30%, 필요한 서류 5%, 나머지 65%가 버릴 서류였다. 미분류상태의 서류는 따로 고무줄로 묶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필요한 서류는 각각 제자리를 찾아 주었다. 버릴 서류는 문서세단기로 가져갔다.


세단기 옆에 쌓아두고 의자를 끌어 앉았다. 쭉쭉 문서가 갈려가면서 퀘퀘묵은 감정과 정리되지 않았던 마음도 같이 정리되길 바랐다. 한참을 갈아지던 세단기에서 조금씩 탄내가 나기 시작하더니 반 정도 갈고 세단기가 멈춰버렸다. 김 주무관님 말로는 세단기가 오래되어 원래 그렇다고 했다. 아마 세단기 열이 식으면 다시 작동될 것이라 했다. 반 정도 남은 서류를 다시 가지고 와서 다시 세 번째 서랍에 넣어두었다.


맨 위에 올라와 있던 서류를 보니 열심히 공부하려고 뽑아놓은 공문에 노란형광펜 밑줄이 그어져 있고 파란색 볼펜으로 주석을 달고, 빨간색 볼펜으로 열심히 중요부분에 동그라미 표시와 별표시까지 동시에 그려져 있었다. 지금은 머릿속에 있지만 그당시에는 그게 그렇게 중요했다. 저 시간이 없었다면 지금의 연이가 없었고, 그 시간을 잘 버텼기에 오늘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니 추억의 시간이 녹아있는 종이 한 장을 꺼내어 한쪽에 빼내었다.


한 단계 성장한 연이와 그 당시의 연이가 마주하니 묘한 감정이 일었다. 절대 외워지지 않을 것 같은 수학 공식이 어느새 머리에 들어와 있는 것처럼 이제는 그 종이의 중요도는 버려도 될 정도가 되었다니 연이는 그 시간을 감내한 것에 감사했다. 앞으로 1년, 3년, 5년, 10년이 흘러 과거의 연이와 마주할 일이 있다면 그 만남을 소중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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