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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눈 Jan 06. 2022

손가락 마디마디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첫사랑을 만난다면(37_소설)

“아냐, 나 남자 친구 없어. 나도 유현이 너 좋아해. 그것도 아주 많이.”   




그는 말없이 고개를 들었다. 물을 머금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의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내 손가락이 파고들었고, 그는 큰 손을 가볍게 주먹 쥐어 내 손등을 감싸주었다. 손가락 마디마디 느껴지는 그의 체온에 모든 걸 맡기고 싶었다. 그의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묻자 그는 한동안 가만히 있다가 그제야 실감이 나는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러니까… 여름이 너도 내가 좋다고? 진심이야?”

“응. 나도 유현이 네가 좋아.”



“아…. 너무 신기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날 좋아할 확률은 굉장히 희박하다고 생각했거든. 이 많은 사람들 중에 같은 마음인 게 참 신기하고 소중한 일이잖아.” 떨리는 입술로 한 글자씩 내뱉는 그의 목소리에 내 입가에는 금세 웃음이 번졌다.       


        

“내가 유현이 너 좋아하는 줄 몰랐어? 여러 번 말하려했는데 그때마다 네가 말을 돌려서 난 네가 나 싫어하는 줄 알았어.”


“혹시 그 말일까 싶긴 했는데…. 남자 친구 있는 채로 그 이야기 하는 게 싫었어. 끝이 정해진 관계잖아. 네 마음이 그렇다고 해도 넌 남자 친구를 택할 거라고 생각했어.”



“왜?”

“여름이 넌 책임감도 강하고, 싫은 소리도 못하고. 그리고 나한테 진심이라면 남자 친구랑 헤어지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거든. 네가 그냥 스쳐 지나가는 감정으로 말해버리면, 우리 관계는 돌이킬 수 없으니까. 그냥 서로 좋아한단것만 알고 우리 관계가 끝 날까 봐.”    


 

“대체 왜 남자 친구 있다고 생각한 거야? 난 남자 친구 이야기 한 적 없는 것 같은데.”

“우리 답사 간 날, 여름이 네 남자 친구한테 전화 왔었잖아.”


“아… 맞아 그때는 남자 친구 있었지. 근데 그날 바로 헤어졌어.”


“그랬구나. 계속 만나는 줄 알았어. 우리 정문에서 마주쳤을 때도 네가 남자 친구 따라갔고, 철학과 동기들 앞에서도 나 피하는 것 같았거든. 또 비 오는 날, 나 우산 사러 간 사이에 남자 친구랑 안고 있었잖아.”


“내가? 아냐 그럴 리가. 그땐 이미 헤어진 뒤였는 걸. 절대 아냐. 나한테 남자 친구 있는지 물어보지….” 대체 어떤 상황이 그렇게 보인 걸까.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잘 못 본 걸까. 세차게 내리던 비가 원망스러웠다.




“사실 너희 과 사람한테 물어봤었어. 내 동기랑 너희 과 1학년이랑 기숙사 룸메이트더라고. 그래서 물어봐달라고 했는데… 예쁘게 만난다고 너무 부러운 커플이라고 하더라고.”     

“그랬구나. 1학년이라서 내가 헤어진 줄 몰랐나 봐.”


“그러게. 너한테 직접 안 물어보고 뒤에서 묻고 다녀서 미안해. 너한테 직접 물어보면 네가 나랑 만나는 데 죄책감을 느낄 것 같아서. 친구로라도 옆에 있고 싶었어.”  



“그랬구나. 아냐, 지금이라도 서로 오해를 풀었으니 괜찮아. 근데 유현아, 나도 물어볼 게 있어. 너 나한테 관심 있으면서 왜 가을씨랑 연락해? 난 네가 가을씨 좋아하는 줄 알았어.”


“가을씨가 우리 모둠 과제 같이 하는 형님들께 내 번호를 물어봤나 봐. 연락 오길래 가을씨한테 나는 너 좋아한다고 말했어.”


“나 좋아한다고 말했는데도 그렇게 계속 다가오는 거야? 대단하네. 사실 가을씨는 같은 여자가 봐도 멋있어, 자기 마음에 솔직하고 당당하고.”


“그런가? 난 너밖에 안 보여, 여름아. 나는 사계절 없이 영원히 여름에 살고 싶어.”


     

우리는 해먹에 앉아 별을 보며 그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한 달 동안 서로에게 마음이 향했으면서 각자 가슴 아파하고 고민했던 일들이 많았다. 진작 알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지금이라도 알게 되어서, 너와 나의 마음이 같아서 기뻤다.



“유현아, 나 사실 내가 먼저 고백하고 싶었어. 나 한 번도 고백 안 해봤거든.”

“그래? 그럼… 고백 취소! 없던 일로 하자. 나 초능력 있으니까 내가 시간을 뒤로 돌릴게. 자, 이제 됐어!”    


 

“뭐래, 이렇게 멍석 깔아주면 못 해.” 내가 고개를 젓자 유현이는 무슨 말이냐는 표정으로 날 보며 물었다.  

   

“여름아 너 왜 안 자고 나왔어? 난 별 보고 들어가려고. 추운데 어서 들어가서 자.” 그의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부끄러웠지만, 그의 상황극에 맞춰 내 마음을 고백하기로 했다. 마지막 1년인데, 내가 하고 싶었던 건 후회 없이 다 해야지. 지난 인생과는 확연히 다른 삶을 살 거야.    


  

“유현아… 좋아해.” 다시금 입으로 내 마음을 뱉으니, 부끄럽고 긴장이 돼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너무 좋은데? 좀 더 참고 기다릴 걸 그랬나 봐.”

“으이구, 정말.”                




그때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들려서 고개를 돌리니 성민씨가 신발을 신고 있었다.

“뭐야, 안유현 너 아직도 안자? 어, 여름씨도 계셨네요?”

“이제 자야지. 넌 왜 나왔어?”



“나 화장실 가려고. 아까 맥주를 너무 많이 마셨나 봐. 근데 너… 지금 여름씨랑 손 잡고 있는 거냐?”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우리 둘을 번갈아 보았다.



유현이는 우리 사이를 말해도 되겠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현이는 잡은 손을 위로 들며 말했다. “응. 우리 만나기로 했어.”



“뭐? 얘들아 일어나 봐!!! 안유현 연애한대!!!!!”

“야, 이성민!!” 유현이가 다급하게 그의 입을 막았다. 성민씨는 지난 삶이랑 변한 게 없구나 싶어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왜, 알려야 될 거 아냐! 우리 과대 드디어 연애한다고!” 성민씨가 유현의 손을 잡아떼며 말했다.

“됐거든, 얼른 화장실이나 가. 새벽인데 애들 다 깨겠어.”   


   

“유현아, 나도 이제 들어갈게. 밤이 너무 늦었네. 너도 성민씨랑 같이 들어가.”

“더 이야기하고 싶은데….”


“우린 이제 시간이 많잖아. 내일 아침에 보자.”

“알겠어, 여름아. 좋은 꿈 꿔!”          





숙소 안으로 들어가서 혜지 옆에 자리를 잡고 누웠다. 드디어 유현이와 연인이 되다니, 10년 넘게 꿈꿔왔던 순간이 현실이 되자 너무 기뻤다. 유현이와 있었던 일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의 말을 듣고 이전 일을 떠올리니 마음 아팠던 그의 행동들이 이해가 됐다. 그의 말과 행동을 떠올리다 필름이 끊기듯 잠에 들었다.          








다음날, 밝은 빛에 눈을 떴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없었다. 이미 이불보들은 다 개켜져 있었고, 부엌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창문으로 마당을 보니, 동기들은 마당에서 약학과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내가 늦잠을 잤구나. 얼른 씻고 나가야지. 화장실로 들어가니 혜지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여름아, 일어났어? 너 너무 곤히 자서 안 깨웠어. 아, 아까 유현씨가 너 찾더라.”

“다들 일찍 일어났네. 지금 몇 시야?”


“11시. 너 요즘 잠 잘 못 잔다고 했잖아. 오랜만에 푹 잤겠네.”

“응. 정말 개운해. 나도 얼른 씻어야겠다.”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다른 애들은 준비 다했어. 너랑 내가 마지막이니까 서두르자!”



 12시까지 퇴실해야 했기에 서둘러 세수하고 옷을 갈아입은 후, 밖으로 나섰다. 약학과 친구들은 자동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유현아, 잘 잤어?”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그에게 다가갔다.

“응. 근데 우리 어제 무슨 일 있었어? 술을 너무 많이 마셨는지 기억이 안 나네.”



“뭐…?” 너무 당황스러워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두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 짧은 시간 안에 침이 바짝 마르고 입술이 건조해지는 게 느껴졌다.          



“장난이야, 장난. 너무 떨려서 한 숨도 못 잤어. 근데 넌 너무 푹 자더라고. 약 올라서 심술 한 번 부렸어.” 그는 못 참겠다는 듯 온 얼굴로 웃었다.    

 

“아, 정말!” 주먹으로 유현이의 팔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을 본 약학과 동기들이 우리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아, 내 친구들한테는 다 이야기했어. 너희도 곧 출발하지? 학교 도착해서 보자.”

“너 잠 못 잤는데 좀 자야 하는 거 아니야?” 그의 말에 그들에게 고개를 가볍게 숙여 인사했다.



“괜찮아. 잠자는 거보다 너 보는 게 더 좋아.”

“그래도. 그럼 좀 쉬다가 4시쯤 정문에서 만날까?”


“네가 그러고 싶다면 그렇게 하자. 아니다, 내가 4시에 너희 집 앞으로 데리러 갈게. 이건 괜찮지?”

“알겠어. 조심히 가, 유현아.” 



유현이와 약학과 친구들이 먼저 출발한 뒤, 우리도 뒷정리를 마치고 나섰다. 학교로 돌아가는 길, 동기들에게 유현이와 만나게 되었다는 말을 하자 동기들은 모두 자기 일인 양 기뻐했다.








사진 출처: 핀터레스트, 드라마 내ID는 강남미인

매주 월, 목 4시30분에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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