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단풍나무 씨앗, maple seed

픽사의 애니메이션 <소울>에 나왔던,

by 돌이

네 시 사십 분, 나는 어린이집에 가기 위해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요즘은 버스정류장이 참 좋아졌다. 바람을 막아주는 가림막도 설치되어 있다. 바람 가림막이 버스 기다리는 시간을 조금 쾌적하게 해 준다면, 버스 정류장 자체를 아늑하게 만들어주는 장치도 있다. 정류장에 놓인 벤치다. 재생에너지를 이용해서 따뜻하게 데워진 벤치는 옛날 시골집 아랫목을 생각나게 한다. 미리 챙겨간 책 한 권을 펼쳤다. 버스 정류장을 유유히 지나가시던 할머니께서 정류장 안으로 되돌아오셨다. 가림막이 잘 안보이셨는지, 플라스틱 문에 얼굴을 쾅하고 부딪히셨다. 할머니는 머쓱한 기색도 없이 성큼성큼 정류장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해가 참 많이 길어졌어요잉. 12월 21일, 동지가 지난 지 한 달밖에 안되얐는디."

가만 생각해 보니 한 달 전만 해도 다섯 시 20분이면 어둑어둑했는데, 해가 길어지긴 길어졌구나.


공원에서 주운 단풍나무 씨앗 하나

나는 아이들을 하원시켜 근처에 공원으로 갔다. 가지가 앙상한 나무들 사이, 푸른 소나무가 한 그루씩 심어져 있었다. 아이들은 텅 빈 공원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그네로 달려갔다. 나는 서너 걸음 떨어져서 공원 벤치에 앉아 막걸리는 드시는 할아버지를 보았다. 낮게 구구 소리를 내는 멧비둘기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아빠, 그네 좀 밀어줘."

두 아이의 그네를 밀어주다 보니 어느새 막걸리를 마시던 할아버지도, 구구 소리를 내며 울던 멧비둘기 소리도 없었다.


그때, 한 남자아이와 그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유유히 다가왔다. 그네를 타고 싶은가 보구나, 싶어 나는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얘들아, 여기 단풍나무 있다."

아이들이 쪼르르 내 곁으로 왔다. 단풍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단풍나무 씨앗을 열심히 주웠다.

"이거 지난번에 봤던 그 씨앗인데?"

둘째가 단풍나무 씨앗을 내 손에 올려 두며 말했다. 나는 벤치로 올라가 단풍나무 씨앗을 높이 던졌다. 씨앗이 프로펠러가 돌아가는 것처럼 유유히 내려왔다. 날개가 하나인데도 이렇게 천천히 내려올 수 있다는 게 봐도 봐도 신기했다. 두 아이도 신기했는지, 시선을 바닥에 두더니 단풍나무 씨앗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단풍나무 씨앗 하면 픽사의 23번째 영화 <소울>이 생각난다. 22번째로 태어났어야 할 '22'는 수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태어나지 못했다. 재즈 피아노 연주자가 꿈이었던 윌리엄은 일생일대의 기회를 얻은 그날, 맨홀 구멍에 빠져 죽었다. '22'와 윌리엄은 태어나기 전 세상 '유 세미나'라는 곳에서 만난다. 윌리엄은 위인을 사칭해 '22'를 태어나도록 돕는 멘토가 된다. 윌리엄은 다시 자신의 몸으로 돌아가 재즈 공연을 마치고 싶고, '22'는 수천 년 동안 그래왔듯이 계속 영혼으로 남아있고 싶다.


단 한 번도 태어나고 싶지 않았던 '22'는 찌질한 인생처럼 보이는데도 불구하고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윌리엄에게 호기심을 갖는다. '22'는 윌리엄이 다시 몸으로 돌아갈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고, 윌리엄이 돌아가는 과정에서 일이 꼬인다. '22'가 윌리엄의 몸에 들어가고, 윌리엄은 고양이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다. '22'는 질색한다. 냄새나고 보잘것없는 고깃덩어리에 자신의 영혼이 들어갔다는 사실을 부정한다. 다리로 걷지도 못하고 손가락을 사용하지도 못한다. 그랬던 '22'가 손바닥에 떨어진 단풍나무 씨앗을 보고 결심한다. 계속 살아보기로.


윌리엄은 용납할 수 없다. '22'는 다시 '유 세미나'로 돌아가야 하고, 자신은 육체를 되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 윌리엄은 자신의 몸으로 들어가 예정되어 있었던 재즈 공연을 성공리에 마친다. 집에 돌아온다. 윌리엄은 왠지 허탈하다. 공연을 잘 마치면 뭔가 엄청난 게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건 없다. 매일 눈을 뜨던 집, 연습하던 피아노, 그리고 그 공간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윌리엄 자기 자신까지. 윌리엄은 호주머니를 뒤적여 들어 있는 것을 죄다 꺼낸다.

영화 <소울>의 한 장면

윌리엄의 호주머니엔 '22'가 윌리엄으로 살았을 때, 모아 둔 '22'의 일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22'에게 먹는 즐거움을 줬던 피자 조각, 엄마의 사랑을 느끼게 해 줬던 실타래, 생에 대한 소중함을 알게 해 준 단풍나무 씨앗까지. 윌리엄은 '22'가 자신의 호주머니에 담아둔 그의 일상을 하나씩 회상했다.


오랜 시간 태어나기 싫었던 '22'의 마음을 돌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연히 단풍나무 씨앗 하나는 아니다. 좌충우돌 대리 경험했던 윌리엄의 일상이다.

나의 일상도 매일 반복된다. 눈을 뜨고, 이부자리를 정리한다. 아이들을 등원시키고 운동한다. 집안일을 하고, 책을 읽는다. 저녁을 먹고, 아이들을 씻긴다. 아이들이 잠에 들면, 글을 쓴다. 매일 글을 쓴 뒤로 조금씩 내 일상이 달라지고 있다. 재미도 있다. 글을 쓰는 이 시간만큼, 어떤 걸 쓸까 고민하는 시간도 즐겁다.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확실한 건 매 순간순간을 살 것입니다."(영화 소울의 대사)


단풍나무 씨앗 덕분에 오늘 하루, 순간을 살 수 있었다.


2025년 1월 24일 365개의 글 중 8번째 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과잼, Apple ja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