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암치료의 희망
암세포의 위치가 너무 고약하다. 식도의 끝부분과 위장의 맨 아래 끝에 넓게 자리 잡았고 중간에도 곳곳에 산발적으로 퍼져 있는 탓에 위 전절제술(위를 다 잘라내는 수술)을 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요즘은 방사선이나 약물등으로 암세포의 사이즈를 줄여서 수술을 한다고 하던데 그때는 그런 의술이 없었던 것 같다. 만약 그럴 수 있었다면 혹시 작게나마 위가 남아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고 얼마나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수술 준비부터 수술실에 들어가기까지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수술을 마치고 회복실로 갈 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기도는 했는지, 울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아무것도,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후로 기다리는 시간에 대한 강박증이 생겼고 불안과 초조함으로 오랫동안 고생을 많이 했다.
위장이 없는 자리에 식도와 소장이 바로 연결이 됐고 음식을 먹어도 소화 효소가 분비되지 않으니 최대한 꼭꼭 씹어야 하고 두 시간마다 두 숟가락 정도밖에 먹지를 못한다.
-위가 없어서 배가 부르다는 느낌보다 항상 속이 불편하다고 그 작은 양도 먹기 힘들어했다.
건강한 사람들의 위장은 독한 위산이나, 음식물의 역류를 막아주는 유문이 있지만 위장이 없는 그는 역류에 무방비 상태여서 반듯하게 눕는 것은 안된다고 한다. 똑바로 누울 경우 음식물과 소장에 머물러 있는 내용물이 역류하면서 식도까지 손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상체를 항상 45도를 유지하며 그 상태로 잠을 자야 한다는 것이다.
-남편이 바닥에 바로 누웠을 때는 봄이었다.
고맙습니다.
퇴원 후 첫 외래 진료를 갔던 날 수술을 집도 하셨던 선생님이 고맙다는 말씀으로 우리를 맞이하셨다.
“수술 도중에 잘못될 줄 알았는데 살아계셔서 고맙습니다.”
“......?”
남편의 모든 장기가 성숙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처럼 투명하고 얇아서 수술하기가 무척 힘들었고 수술 도중에 장이 찢어지거나 구멍이 나서 자칫 다른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었는데 무탈하게 잘 견뎌줘서 고맙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178cm의 키에 몸무게 54k, 남편은 의사 선생님의 염려가 전혀 이상하지 않을 만큼 야위었다. 잘 견뎌내고 옆에 있어 줘서... 명치 따라 올라오는 무엇인가를 애써 삼켰다.
검사와 수술을 하면서 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들은 친가와 외가로 번갈아 가며 생활을 하고 나는 1주일에 한 번 정도 옷을 갈아입을 때만이라도 아이들을 볼 수 있었지만 남편은 아직 어린 녀석들이 환자와 병균이 득실거리는 병원에 오는 것은 위험하다며 보고 싶은 마음을 참았고 한 번 잠깐 병원 마당에서 아빠를 보고 갔다.
퇴원 후 정기적으로 항암주사를 맞으러 갈 때 아이들을 부탁하기 위해 시댁이 가까운 남산동에 집을 구했고 남편은 병가 상태이다.
매번 항암치료 일주일 전부터 남편의 얼굴은 두려움과 걱정으로 사색이 되고 조금밖에 먹지 못하는 식사마저도 제대로 못 먹는다. 체력을 유지해야 항암도 견디는데 억지로라도 먹어 보자고 하지만 도무지 먹지를 못하니 항암을 견뎌 내야 하는 일이 걱정이었다.
항암센터는 건강한 사람도 지나가기 싫은 곳이다. 센터 입구를 들어서면서부터 코를 찌르고 인상을 찌푸리게 하는 항암제 특유의 냄새가 구역질이 날 정도이니 그 주사를 맞아야 하는 본인은 오죽하겠는가?
건강한 사람에게도 이렇게 힘든 일인데 아픈 남편은 얼마나 힘들지... 항암주사는 수액을 통해 주입을 한다. 주사액은 색깔부터 묘하게 기분이 나쁘고 보는 것만으로도 힘이 빠진다.
시뻘건색과 음침한 푸른색 각각 두 개의 약을 투명한 링거 줄에 꽂을 때부터 남편은 고개를 돌린다. 급기야 시뻘건색이 혈관에 닿는 순간 남편의 고통은 시작된다. 꼭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통해 나에게까지 그 아픔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항암주사는 색깔보다 더 고약한 것이 냄새다. 혈관을 타고 들어가면서 바로 온몸으로 그 존재감을 드러내면서 퍼진다. 남편은 아픔을 잊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지만 그의 입은 이미 항암약 냄새로 가득 차서 헛구역질이 올라오기 시작하고 더 이상 정신력으로 버티기엔 역부족이다. 모든 에너지가 빠져나간 듯 눈을 감고 입을 다문다. 이후로도 항암의 횟수가 거듭 되면서 남편은 점점 말을 잃어갔고 나는 '여보 견디자, 당신은 할 수 있어요'라는 말을 수 없이 되뇌었다.
지금도 그 병원에는 당시 있었던 항암센터가 그대로 있다. 새 병동이 생기면서 환경은 더욱 깔끔하고 좋아지면서 항암주사약 냄새도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곳은 지날 때는 그 냄새가 나는 것 같고 뒷목이 서늘하다.
-한참 뒤에 나도 그 병원에서 암수술을 받고 치료를 하면서 그 느낌을 받았다.
따뜻한 기억
남편의 선한 미소는 언제나 우리 세 식구를 안전하다고 느끼게 한다. 항암 치료 가기 1주일 전과 치료 후 10일 정도를 제외하면 그는 여전히 나와 아이들에게 편안하고 행복한 웃음을 짓는다.
한 달에 반만 볼 수 있는 웃음이지만 우리 네 식구에게는 그것은 희망 그 자체였다.
남편이 특히 좋아하는 반찬이 몇 가지 있다. 소금 살살 뿌린 갈치구이, 조기구이, 그리고 꽃게 된장국이다.
부드러운 연두부와 애호박을 넣고 된장으로 심심하게 간을 맞춘 국물에 꽃게 두 어마리 퐁당, 꽃게 된장국을 끓인 날 저녁 식탁에 조용한 전쟁이 터졌다.
꽃게 된장국 속의 게다리 쟁탈전이 벌어진 것이다. 아버지는 젓가락이 아직 서툰 두 아이들을 놀리고 아들들은 아버지의 젓가락 끝과 개구쟁이처럼 싱글거리는 아버지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이제 없네”
“아니에요 아직 남아있어요, 아까 봤어요”
“아니, 없는데”
된장국을 휘휘 저으며 꽃게를 다 먹었다고 하는 아버지와 아직 한 조각 남아있다고 말하는 아들들의 유쾌한 전쟁이다. 남편은 꽃게다리 한 개를 된장 국물 속에 숨겨두고 두 아들을 놀리는 재미에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게다리를 서로 먹겠다고 투닥거리는 세 부자의 모습에 사랑이 툭툭 묻어있다.
두 아이들의 웃음은 남편의 웃는 모습을 그대로 빼닮았다.
-어릴 적에 아버지와 헤어졌지만 희한하게 식성이며 작은 생활 습관까지 닮은 큰 아들은 남편이 살아온 것처럼 붕어빵이다. 한 번은 아버지 군대 시절 사진을 들고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에게 보여주면서 아들이 자신의 군시절이라고 말하면 다들 '벌써 다녀왔냐'라며 믿었다고 할 만큼 달았다.
첫째는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을 안다. 6살 어린 나이지만 투정이나 어리광 없이 의젓하고 4살 먹은 작은 녀석은 아버지가 아픈 것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모르지만 애교도 많고 수줍음도 많은 그저 천진하고 귀여운 깐돌이다.
우리가 사는 남산동은 시댁이 있는 구서동과 금정산이 가깝다. 산이 가까운 만큼 공기가 맑고 2주간의 항암 고통에서 벗어나면 매일같이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등산을 간다. 집으로 들어서는 아이들의 손에는 한가득 나뭇가지며 잎이며 소중한(?)것들이 들려온다. 어떤 날은 도토리를 한 움큼 가지고 와서는 도토리묵을 만들겠다 하기도 하고(아버지가 하는 이야기를 듣고) 홍시를 따 먹은 날은 고사리 손에 고이 쥐고 와서는 '어머니 드리려고 가져왔어요' 하며 상기된 얼굴로 자랑스럽게 내밀지만 작은 손 안에서 온전할 리가 없다.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홍시를 먹는다.
아이들과 함께 하는 그 시간이 남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고 앞으로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투병하는 10개월 동안
2시간에 한 번씩 식사를 했고
매일 아이들과 등산을 했고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
인삼 달인 물 그리고 개고기 삶은 물을 먹었고
한 달에 한 번씩 받던 항암치료가 끝난
추운 겨울, 남편은 휴직을 마치고 출근을 했다.
오전만 근무하는 배려를 받았지만...
하루라도 빨리 퇴직을 하고
앞으로는 내가 일을 하고 남편은 집에서 쉬게 하리라
그러면 조금 더 빨리 건강해질 거고
의사 선생님 말처럼 소장이 위장처럼 주머니가 생길 것이고 그러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안정적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한 번도 놓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