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삶을 용서하기로 했다

나, 위암이란다.

by 힐링아지매

부모의 도리, 자식의 도리


나의 이상형과 만난 지 일 년이 되어가던 즈음 엄마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면 장성한 자식들을 독립시키는 일 또한 부모의 도리라고 여기던 시절이었다.

부모님에게 딸의 독립은 결혼을 시키는 것이라 생각하셨고 건강이 좋지 않은 엄마는 첫 딸이 엄마 없는 결혼을 하지나 않을까 염려스러워 21살부터 집안 어른들의 주선으로 두 차례나 맞선을 보게 할 만큼 분은 을 독립시키는데 심이었다.


정작 당사자들은 결혼 이야기 꺼내지도 않았는데 양가 어른들리 상견례도 잡고 결혼식 날짜도 잡고 우리는 냥 따르기만 했다.


결혼식장은 시아버님이 예물은 시어머님이 신혼여행은 연히 제주도로 정하면서 우리의 결혼은 착착 진행되었다.

시아버님이 정해주신 예식장이지만 드레스 선택권은 내게 주고 그나마 최선을 다해 고르기만 하고 예물 시계는 시어머니 단골 방물장수(?)의 가방에서 이거냐 저거냐 에서 하나를 골랐 결혼반지, 한복, 양복 모두 남편 없이 어머니와 둘이서만 준비를 하는 상황에서도 우리는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다가온다는 것에만 의의를 두었고 22살, 26살 11월에 우린 결혼을 했다.



시댁 방 한 칸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당시만 해도 아침마다 한복을 차려입고 시부모님에게 아침저녁 문안 인사로 절을 드렸다. 딸이 없는 집안에 들어온 어리고 싹싹한 며느리에 대한 시아버님의 사랑은 넘쳐 났지만 어머님은 달랐다. 가난한 집 딸이 못마땅하시다며 무심코 하시는 말에 베이고 생각 없이 던지는 돌에 맞아 매일 밤 눈물로 보냈다.


"없어도, 없어도 어찌 저렇게 없는 집 딸을..."


"어릴 때 얼마나 못 먹었으면 이렇게 추위를 많이 타노?"


수시로 혀를 '끌끌'차면서 가난한 친정을 무시했고 어머니 말씀이 다 틀린 말이 아닌 탓에 난 괜히 죄인이 되었고 그럴 때마다 더욱 모님과 작은 방에 옹기종기 모여 체온을 나누던 친정의 시간들이 그리워 하루도 눈물 마를 날이 없었다.


선비 같은 남편은 나의 눈물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시어머니 흉을 보는 것 같아 시시콜콜 말을 할 수가 없었고 그때만 해도 난 어쭙잖게 유교에서 말하는 착하고 순한 며느리의 도리를 따르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팔베개에 흐르는 눈물을 이상하게 여긴 남편이 눈물의 이유를 물었고 그간의 상처들을 하나씩 들춰 보였다. 나의 상처를 다 살펴본 남편이 해준 이야기는 사는 동안 내내 위로가 되었고 든든한 내 편이 되어 주었다.


"우리 엄마는 장모님과는 다르니까 엄마한테 하듯이 속을 다 내놓지 마라"


애정과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던 시아버님은 결혼하고 2년이 되던 해에 돌아가셨고 그렇게 기다렸던 손주는 아버님 100일 탈상 다음 날 예정일보다 며칠 빠르게 태어났다.

9시간의 진통 끝에 첫아들을 낳았고 가난한 집 딸이라고 구박하시던 시어머니는 삼칠일이 될 때까지 지극 정성으로 산후조리를 해주셨다.

내게 있어 시어머니는 가깝지도 않고 멀지도 않은 그런 특별한 분이다.


분가, 전출... 그리고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큰 아이가 5개월 될 즈음 집안에 예기치 않은 일들이기면서 처음엔 아들과 내가, 그리고 얼마 있다가 남편까지 시댁에서 나오게 되면서 리는 강제 분가를 하게 되었다.

직장 근처로 전세를 얻고 결혼할 때 가져오지 못한 가전 혼수들을 묵묵히 혼자는 준비하는 남편에게 다시 한번 미안하고 고맙고 든든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의해 억지 분가를 했지만 처음으로 세 식구만 함께 하는 시간은 더없이 행복했다.

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쯤째를 임신하면서 뱃속 아이까지 넷이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아갈 즈음 남편이 포항지점으로 발령이 났고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둘째 아이가 태어났다.


객지에서의 우리 네 식구는 교과서에서 말하는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이었고 착실하고 점잖은 편은 이웃들에게 시계방울이라고 놀림을 받을 만큼 무던하고 편안한 사람이었다. 희미해지는 기억과 선명한 감정 사이, 그때는 참 행복했었다.


포항 2년 근무를 마치고 다시 대구로 발령이 나면서 포항에서 대구로 4년 동안 부산을 떠났다가 드디어 부산 가까운 울산 지점까지 왔다. 이제 2년 정도 울산 근무를 마치면 고향 부산으로 갈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우린 또 행복했다.


사랑하고 때론 다투기도 하지만 특별한 문제가 없었고, 아들들은 건강하게 잘 자라주었고 세상의 부모들이 다 그렇듯이 아들들을 바라보는 남편의 눈에 하트가 뚝뚝 떨어지고 퇴근 후 아들들과의 시간이 하루의 피로를 푸는 가장 큰 낙이었다.


자상하시던 아버님을 닮아서 그런지 자식 사랑이 각별했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잘 놀아주고 말이 워낙 없어서 가끔 답답할 때가 있긴 해도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시간들이었다.


각 지역으로 전근을 다니면서도 남편이 하는 업무는 언제나 대출 업무로 경제적으로 힘든 고객들을 상대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참 많았다.

집에 오면 입에도 대지 않는 담배를 밖에서는 하루에 최소 한 갑에서 한 갑 반을 태운다고 했다.

일이 많은 날은 파김치가 되기도 하고 자꾸 등이 아프다며 큰 대자로 누우며 왼쪽 견갑골 아래가 찢어 질듯 아프다며 힘들어하는 날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픈 등 마사지와 안마로 조금이나마 통증을 풀어 주는 것이 그에 대한 안쓰러움과 고마운 마음을 표하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등이 아프다는 말을 더 자주 했고 때때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힘들어했다.

등이 아프다는 것은 많은 신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고 일이 많아서 그런 것이라고만 여겼다.


특별한 외상이 없는 상황에서 등이 아플 때는 간과하지 말고 꼭 정밀하게 점검을 해봐야 할 일이다.


"내, 위암이란다."


1989년 어느 봄날 남편은 은행으로, 아이들은 어린이집으로 다 보내고 청소를 하는 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뭔가 찜찜하고 불안한 시간이 뜸을 들이고 있다.


그리고...


“내, 위암이란다.”





“......”





"얼마 전에 있었던 회사 건강검진 결과가 이상해서 다른 병원에서 다시 검사를 했는데.... "




다리에 힘이 풀리고 알이 빠진 반지를 끼고 있던 손은 허공을 저으며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전화가 오기 전 걸레질을 하다가 무심코 바라본 손가락의 결혼반지에 다이아몬드가 없어진 것을 알았다. 다이아몬드가 그렇게 쉽게 빠지는 것이 아닐 텐데... 알이 빠진 반지을 보는데 왠지 서늘한 기분이 들어서 여기저기 찾고 있을 때 전화벨이 울린 것이다.


“다른 병원에 가서 다시 한번 검사받아봅시다.”


“두 군데 병원에서 같은 말을 한다.”


이미 남편은 그 사실을 알고 혼자서 이곳, 저곳에서 검사를 받았던 것이다. 차마 얼굴을 보고 말을 할 용기가 없어서 전화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결혼하고 7년이 되던 해였다.


다음 날부터 우리는 하루빨리 부산으로 돌아올 계획을 세웠고 부산 송도에 있는 복음병원(고신의료원)에서 전체적으로 다시 검사를 했고 수술도 하고 항암치료도 하면서 함께 이겨내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자신 있었다.

남편의 건강을 되찾고 다시 행복한 시간으로 돌아갈 자신 있었다. 우리 가족에게 일어난 일은 그저 지나가는 소나기에 불과하고 소나기가 지나가고 나면 무지개가 뜨고 화창해질 거라는 해피엔딩을 믿고 있었다.


"지금 몇 시고?"

그는 연거푸 계속 묻고 그때마다 계속 답을 하고 있는데도 계속되는 물음과 나의 대답에 허공만 응시하던 그의 초점 없는 눈을 바라볼 때 까지도 나는 믿고 싶었다.





희미해져 가는 기억과

지금도 선명한 감정들이

온몸을 아프게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간들을 떠올리며 이렇게 기록하려고 하는

이 마음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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