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때문에 아프고 사람 덕분에 산다
산길이 그렇게 험하지도 않고 완만하게 오르는 길이다. 동생은 길을 따라가지 않고 자꾸 옆으로 빠지려고 한다. 요령 소리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는데 동생은 주변을 살피느라 자꾸 걸음이 뒤처진다. 딸랑딸랑 요령소리가 더 요란하게 울려대자 다시 제대로 길을 쫓아가고 있다. 미련이 남은 것인지 아쉬움인지 계속 두리번거리며 집중하지 않는다. 이제 가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저 모퉁이를 돌면 상여는 사라질 텐데 드뎌지는 걸음에 애가 쓰인다. 흐르는 눈물과 함께 목소리를 더 높여본다. 내 동생, 이 생에서 맺었던 인연 모두 내려놓고 미련도 다 버리고 부디 극락왕생 하거라.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오늘 초재를 시작으로 49재를 지내는 동안 이승에서 막내와의 인연을 맺음 하려 한다. 부디 동생이 편안하게 부처님 품에 안길 수 있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한다. 아버지는 불쌍한 막내를 가슴에 묻고 우리는 팔다리가 잘려나간 것 같은 아픔을 견디고 있지만 남편을 잃은 올케의 아픔과 두려움에 비할까. 올케의 비통함과 두려움, 좌절감이 지난 시간 나의 그것과 오버랩이 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깜깜한 동굴에 갇힌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막막함, 적어도 나는 그랬다.
아직 돌도 되지 않은 작은 조카는 자라면서 아빠의 존재를 어떻게 기억할까? 아빠에 대한 개념이 있기나 할까?(나의 작은 아들은 5살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사진 속에만 있다고 했다)
6살 큰 조카는 사진 속에서 저를 보고 웃고 있는 아빠에게 영문도 모른 채 절을 하고 영정 사진 속에는 광대를 끌어올린 눈웃음으로 우리 모두의 절을 받으며 막내가 환하게 웃고 있다. '막내야 이제 아픔 없는 곳에서 하고 싶었던 공부도 실컷 하면서 부디 극락왕생 하거라.'
막내를 챙기고 막내를 보내느라 자리를 비우는 사이 우리 팀은 뿔뿔이 흩어지고 그녀 한 사람만 남아서 우리 팀을 지키고 있다. 장기 결근 기간 동안 새로운 지점으로 발령이 나면서 팀원들은 각자 살 길 찾아서 다른 회사로 떠나거나 본부 내 다른 지점을 찾아 떠났지만 그녀만은 끝까지 의리를 지키며 나를 기다려 줬다.
매니저가 되고 첫 팀원이 되어준 그녀, 입사 시절에 세 명의 팀장중에서 그녀가 선택한 사람은 나였고 나 역시 그녀가 좋았다. 우리 둘은 서로 첫눈에 반했던 것이다. 그녀의 철없어 보이는 엉뚱함과 자유로움이 좋으면서 부러웠다. 입사 면접 때 평소에 왜 화장을 안 하냐는 질문에 ‘안 해도 예쁘다고 생각해서요.’라고 당당하게 답했고 보험을 시작하면 주변 지인들이 보험설계사 하지 마라, 보험 영업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여자 보험 설계사들에 대한 편견이 어떤 줄 아느야 하는 등 부정적인 말로 힘을 빼면 어떻게 극복하겠냐는 질문에 ‘내 주변에는 그런 사람들 없어요. 잘할 수 있어요.’라며 아주 간단명료하게 우문현답처럼 대답을 했다.
그녀의 그런 엉뚱함과 자신감 그리고 천진한 당당함이 좋았고 다른 팀장들은 그 모습들이 싫어서 팀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고 했다.
그로부터 내가 퇴직을 할 때까지 우리는 서로의 선택에 실망하거나 후회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신인 시절 1시간 일찍 출근하라고 해도, 12시까지 일을 하라고 해도 그녀는 군말 한 번 없이 다했고 그 결과 그녀의 삶은 입사 전과 후가 완전히 달라졌다. 20평대의 집이 50평대로 넓어졌고 소형차에서 대형차로 바뀌고 사회 초년생이던 그녀는 어느새 커리어 우먼으로 변신했다. 그런 그녀가 매니저 없이 나의 짐까지 다 싸서 새로운 지점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잘 지내며 나를 기다린 것이다.
지점 이동이 있기 전, 그녀와 내가 함께 있었던 지점은 초임 여성 지점장이었고 본부에서 원하는 만큼 실적을 내지 못하면서 조직은 불통의 시간으로 모두가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초임 여성지점장은 실적도 사람도 다 놓치고 결국 지점 해체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때 그 지점장은 우리 팀도 알아서 떠나 주기를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랬더라면 더욱 확실하게 모든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떠 넘길 수 있었는데 미련하게 지점을 살려보자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우리 팀을 더 괴롭혔는지도 모르겠다.
조직은 한 사람의 힘으로만 움직일 수 없다. 귀 닫고 본인 말만 하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자신만 빠져나갈 궁리를 하는 사람과 함께 일 하는 동안 지점 구성원 모두 몸과 마음이 지치고 지쳐 발 빠른 사람들은 일찌감치 지점을 떠났고 그런 재주가 없는 우리 팀만 남아서 마지막까지 모든 짐을 다 짊어졌고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남겼고 나는 몸이 이상 신호를 보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따로 있지 않으니 마음이 상하면 몸도 망가진다. 이유 모를 어지럼증으로 앉아 있을 수도 없었고 하혈까지 했다. 모든 것이 스트레스로 인한 것이라는 진단과 '영양 보충과 휴식'하라는 처방을 받으며 지점 폐쇄의 시기와 맞물려 자연스레 그 지점장과는 이별을 했고 그녀와 나는 다른 지점으로 발령이 난 것이었다.(그녀는 지금까지 보험 영업을 하면서 20년 이상의 베테랑 설계사가 되었고 우리는 지금도 가깝게 잘 지내고 있다)
건강 검진에서 발견되었던 자궁근종이 위와 같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하혈을 했던 것이다. 이제 의사는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한다. 자궁 내 근종을 잘라내는 것과 자궁 전체를 덜어내는 수술 두 가지가 있다고 하면서도 근종은 잘라내도 재발할 확률이 높고 출산할 일이 없다면 자궁 전체를 덜어 내는 것을 권한다며 집에 가서 상의하고 다음 진료 때 와서 수술 일정을 정하자고 하지만...
누구와 의논하지?
"집에 가도 의논할 사람이 없어요. 그냥 지금 정해요 선생님"
"그럼 모레, 괜찮겠어요?"
"네”
이틀 뒤로 수술 일정이 잡혔고 아기집에 불과한 자궁을 떼는 수술은 내 몸에서 필요 없는 장기를 제거한다고 가볍게 생각하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는데 왜 그렇게 눈물이 나던지...
그 순간 떠오르는 하얀 얼굴, 말없이 선하게 웃고 있는 남편, 크다면 크고 간단하다면 간단한 수술을 결정하면서 한 마디 의논 할 사람이 없다는 서글픔과 두려움에 눈물이 난다. 아무리 큰 수술이 아니라고 하지만 전신 마취를 하고 몸속의 무엇인가를 없애는 것에 대한 두려운 마음도 얘기하고 엄살도 부릴 수 있다면...
나의 서러운 마음과 달리 아이들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당연히 해야 하는 수술이며 수술을 하고 나면 다 좋아질 것이라고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이틀 뒤 있었던 자궁 전적출술은(자궁 전체를 다 없애는 수술) 발달한 의료 기술 덕분에 개복하지 않고 복강경으로 했다. 배꼽을 중심으로 삼각형 모양으로 두 곳에 내시경을 넣을 수 있을 만큼 가볍게 째고 내시경을 통해 자궁을 자르고 잘린 자궁은 질을 통해 빼냈다고 했다. 정작 의사는 어렵지 않은 수술이라고 했지만 자궁을 자르고 남은 부분들은 또 꿰매었을 것이고 배에 칼자국이 없으니 외상으로는 멀쩡하지만 뱃속에서 일어나는 통증은 상상이상이었다.
마취가 풀리면 많이 아플 거라며 무통 주사를 달았다고 했지만 나는 하루 꼬박 통증으로 의식이 없었다. 그 하루의 시간 동안 아픈 것 말고 다른 일들은 전혀 기억이 없을 만큼 심하게 아팠던 기억만 있다. 누가 병문안을 왔는지 수술실을 나설 때부터 큰 아들이 챙기고 보살폈다고 하는데 그 조차도 하루가 지나서야 눈에 들어왔을 만큼 아팠다.
의식이 맑아지면서 아들이 눈에 들어오지만 생각은 역시 또 남편이었다. '여보 수술이 잘 됐나 봐요. 아이들이 다 자라서 내 곁을 지키면서 당신을 대신하고 있어요.’
여자가 자궁을 들어내고 나면 허리에 힘도 쓰지 못하고 여자로서의 구실도 끝났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나의 경우는 다른가? 허리가 아프거나 힘이 없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신기하게도 생리 주기가 돌아오면 생리를 할 때와 똑같은 현상들이 나타난다. 배도 아프고 심리적을 짜증과 우울함으로 힘들곤 했다.
의사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자궁은 아기집일 뿐이고 여성성은 난소와 관련이 있어서 그런 현상이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나 역시도 수술을 결정할 때부터 자궁이 없으면 여성성도 사라지는 줄 알았는데 자궁과 난소의 역할이 다르므로 여성성은 건강하다는 말씀에 괜히 감사했다.
이제 모든 것이 정리가 되는 것 같다. 막내는 내 마음에 고이 담았고 수술한 몸은 조금씩 회복이 되어 가고 지금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나를 믿고 기다려 준 나의 첫 팀원인 그녀와 함께 열심히 일만 하면 되는데 파도에 걸려 계속 제자리에서 빙빙 도는 작은 배처럼 앞으로 나아갈 기미가 안 보인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중심에서 나의 목표를 재정비하고 목표와 문제의 차이를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으라고 했는데 나의 목표와 문제가 무엇인지도 조차도 모르는 시간들이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무기력...
하고 싶은 일도 없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고 기계처럼 출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웃고 이야기하지만 텅 빈 마음은 여전히 바람만 휭휭 분다.
좌절도 하지 말고 포기도 하지 말고 다시 한번 돌아보고 무엇을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방법을 찾는 것이 답이라고 했는데... 좌절하지도 포기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혼비백산... 혼이 놀래고 백이 흩어진 상태... 말 그대로 나의 상태가 그랬다. 남편을 보낼 때만 해도 또 이런 일들이 생길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사람으로 받은 상처는 사람으로 치료하라고 했듯이 지점장과 팀원들로부터 받은 상처는 새로운 지점에서 만난 지점장과 나와의 의리를 지켜준 한 사람으로 인해 치료가 되면서 안정이 되어 가고 있었지만...
난 결국 최악의 상태로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