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아픈 이별
살다 보면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일들은 많이 있다. 사소하지만 아끼는 작은 물건만 하나 잃어버려도 속상하고 안타깝다. 가족 같이 여기는 반려 식물, 반려 동물을 잃은 사람들의 아픔도 마찬가지다. 그중에 가장 가슴 아픈 일은 가까운 사람을 떠나보내는 아픔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을 향해 간다고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어린 나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면 남은 사람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프고 슬프다.
4남매의 맏딸로 태어났지만 4남매가 완전체였던 시간은 채 2년도 되지 않는다.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5살이었던 셋째 여동생은 백혈병으로 부모님 가슴에 무거운 돌덩이 하나 얹어 놓고 일찍 떠났다. 유난히 흰 피부에 눈이 컸다는 것과 둘이 항상 같은 옷을 입고 다녔던 기억, 그날도 엄마는 동생에게 나와 같이 입고 다니던 하얀 반짝이 블라우스를 입혔다.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난 동생은 마지막으로 아버지 품에 안겨서 철길 넘어 어두워진 산으로 갔고 돌아오실 때는 아버지 혼자였다. 그 후로 저녁 무렵이면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언니야’ 부르는 환청이 들리는 것 같아서 한동안 매일 울었던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어린 딸을 보낸 부모님들은 그 아픔을 어떻게 견디며 사셨을까?
수원에 살고 있는 막내 올케의 전화가 그날은 평소와는 뭔가 다르다.
"형님 OO이 아빠가 좀 아파요"
"어디가? 왜? 많이 아파?"
막내가 많이 아프다는 소리에 바로 기차를 탔지만 집이 아니라 서울 아산병원으로 오라는 올케. 병원으로 바로 오라는 그 말에 불안한 마음은 심장이 귀에 붙은 것처럼 크게 쿵쾅쿵쾅 방망이를 친다. 막내 올케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동생인 것 같은데 내가 알고 있는 동생의 뒷모습이 아니다. 큰 키에 적당히 살집이 있고 엉덩이가 펑퍼짐한 마음씨 좋아 보이는 전형적인 아저씨였는데 동생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심장이 얼어붙었다. 살이 다 빠져서 광대뼈가 두드러지고 빛을 잃은 눈빛과 흑색 낯빛에 잔뜩 부은 배로 ‘누나 왔어요.’ 하며 웃는 입술은 물기 하나 없이 말려 올라가고 잇몸이 다 드러난다. 의연하게 웃으며 누나를 안심시키려 하지만 어떤 표정으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멀리서 동생의 뒷모습을 볼 때부터 이미 내 간은 쪼그라 들대로 쪼그라졌고 다리에 힘도 풀리고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차마 동생을 쳐다보고 있을 수가 없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나는 왜 몰랐을까. 왜 이제야 알게 되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고 엄마, 엄마가 생각난다. 엄마가 계셨더라면... 엄마, 엄마 불쌍한 우리 막내 어떡해요. 그간 제대로 챙겨보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ㅠㅠ
급성 간암,
작은 조카가 태어나고 한 달 밖에 되지 않았고 조카가 태어날 때만 해도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았는데 도대체 그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렇게 최악의 상태로 만나게 될 줄 생각도 못했다. 다음 날 아버지와 큰 동생도 부랴부랴 병원으로 왔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다.
아버지는 ‘아이고 나쁜 놈, 아이고 나쁜 놈’이라며 아픈 마음을 대신하신다. 그럼에도 막내는 도리어 자기는 괜찮다고 약 먹고 치료받으면 되니 걱정하지 말라며 우리를 안심시키려고 애를 쓴다.
어릴 때부터 유달리 속이 깊었던 막내는 한 번도 부모님 속을 썩이지 않았고 자신의 일은 스스로 알아서 잘했다. 이번 일만 해도 혼자서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이제야 연락을 한 것이다. 조카가 태어나고 축하의 안부를 물을 때도 다 괜찮다고만 했는데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믿을 수가 없다. 그저 곁에서 손 한 번 더 잡아주고 웃어주고 등을 쓸어주는 것 말고는 해 줄 것이 하나도 없다.
결국 병원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받지 못하고 집으로 왔다. 엄마 대신 동생 곁에서 어린 조카를 키우며 동생 병간호까지 해야 하는 올케의 수고를 덜어주고 동생이 먹고 싶다는 음식도 만들어 주며 옆에 같이 있기로 했다. 그것 만으로도 다행이고 감사하고 미안하고 아프다.
항상 긍정적인 동생은 음식 가리지 말고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하고 싶은 일 다 하라는 의사 선생님 이야기를 하며 함께 외식도 하자고도 하는 우리 막내의 웃음에 가슴이 미어진다.
동생은 마지막으로 입원을 한 번 더 했고 결국 집으로 가지 못하고 앰뷸런스를 타고 고향 부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동생은 유능한 전산 프로그래머였다. 우리가 요즘 사용하고 있는 하나로 교통 카드의 첫 프로젝트 팀으로 작업을 하면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했다. 그 카드가 세상에 나올 될 까지 동생은 집에 오는 날 보다 밤샘 근무가 더 많았고 그 스트레스를 술로 풀면서 과로가 쌓였던 것이다. 아마도 막내의 면역력은 최악이었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고농도의 한약까지 먹으면서 급성 간암의 원인이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동생과 함께 앰뷸런스를 타고 부산까지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다. 객지에서 외롭게 살다가 고향으로 왔지만 바로 입원을 했고 태어난 지 석 달 밖에 되지 않는 작은 조카는 아빠의 얼굴을 제대로 익히기도 전에 아빠를 잃었고 우리는 사랑하는 막내를 하늘로 보냈다.
사랑하는 내 동생, 웃을 때 눈웃음이 매력적인 내 동생, 아내도 자식들도 다 내려놓고 편안하게 훨훨 날아서 엄마도 만나고 자형도 만나거라... 오매불망 그리던 엄마를 만나면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속도 털어놓고 어리광도 부리면서 엄마 사랑 듬뿍 받아야지.
너와 동기간으로 지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정말 많이 그리울 거야 막내야.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을 잊지 않을게.
그리고 그토록 사랑했던 너의 아들, 딸이 외롭지 않게 항상 같이 있을게...
낮은 신음으로 남편을 부르는 작은 올케의 울음소리와 함께 사랑하는 막내는 아버지의 가슴에 또 하나 커다란 돌덩이를 보탰고 우리는 핏줄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몇 년을 울었다. 아버지와 우리는 아주 오랫동안 가족 식사를 할 수 없었다.
“누나야 이제 절대 아프지 마소”
4남매에서 남매로, 우리 둘만 남았고 술이 한 잔 들어가는 날이면 동생은 건강하게 살자고 다짐하고 4남매였던 시절의 추억도 돌아본다. 그토록 사랑하던 조카들은 어느덧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서 잘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