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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

손녀의 생일

by 힐링아지매



"할머니 빨리 9월이 오면 좋겠어^^"


"왜?"


우리 서로 다 아는 이야기를 또 하고 있다. 녀석이 9월을 기다리는 것이 벌써 1년째다. 녀석이 기다리는 날은 어린이날도 아니고 크리스마스도 아니다.


"9월이 되면 뭐가 좋은데?"


"내 생일이 있잖아~~^^"


"생일이 있는데 왜 좋아?"


"생일 파티도 하고 선물도 받잖아"


선물은 어린이날도 크리스마스에도 받지만 생일은 선물은 물론 자신이 주인공이 된다는 것에 흥분하고 기대하는 것이다. 녀석의 눈에서 또 하트가 뿅뿅뿅 터진다. 진심으로 온 마음으로 기다리고 설레는 그날의 모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결혼하고 첫 생일에 시어머니는 소고기 미역국을 끓이고 갖은 나물에 구운 조기까지 아주 멋진 생일상을 받았다. 우리가 결혼하고 처음으로 받은 남편과의 겸상이기도 하다. 뒤에 알았지만 남편이 시어머니에게 부탁을 렸고 어머니는 며느리의 생일이라서가 아니라 아들의 부탁을 들어주신 것이었다.

해의 생일상이 결혼 생활 8년 동안 나의 마지막 생일상이었다.


시댁에는 12번의 제사가 있었고 생일이 있는 10월에 그것도 내 생일 앞, 뒤로 1일, 10일인 탓에 10월 3일 며늘의 생일은 묻혀 버렸다. 나마 두 번째 생일에는 남편에게 선물은 받았다. 하지만 그 역시도 남편에게 받은 마지막 생일 선물이 되었다.

우리 부부는 부모님 댁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어머니는 항상 나를 못마땅해하셨고 효자인 남편은 대놓고 아내 생일을 챙기기가 쉽지 않았다.


퇴근 후 방으로 들어온 남편은 겉옷도 벗기 전에 창문틀에서 접힌 신문지를 하나 건네준다. 그 사이에는 당시 내가 가장 좋아하던 '빠다코코넛'자 한 봉지가 들어 있었다. 시부모님 눈을 피해 티 나지 않게 나에게 전해진 남편의 마음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고민과 연구를 했을까 하는 생각에 그때는 웃음이 터졌지만 지금은 울컥해진다.


시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그 후로 분가를 하면서 내 생일은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렸다. 아이를 데리고 왔다 갔다 불편할 수 있으니 1일 제사 때 가서는 10일 제사까지 지내고 우리 집으로 돌아갔. 그 사이 내 생일이 있다는 것은 친정 부모님만 기억하고 계셨다.

남편이 떠난 그 해 맞은 생일은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결혼하고 일곱 해나 못 먹은 생일 미역국을, 조기 구이를, 나물을 한 번에 다 올려서 상다리가 부러지게 생일상을 받았다. 엄마는 그간 미역국 한 번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 딸이 안타까워 갈비찜까지 만들고 직장 동료들도 초대하게 했고 남편 없이 보내는 첫 생일에 나는 처음으로 서른 송이 장미꽃을 선물 받았다.






아이들이 어릴 때 우리 집의 연중행사는 남편 기일, 그리고 두 아들과 나의 생일이다. 살림살이가 아무리 빠듯해도 이 네 번의 행사는 그냥 지나치지 않고 챙겼다. 친정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엄마 덕분에 집밥으로 미역국을 먹었지만 그 후로 우리 세 식구는 외식을 하면서 생일을 보냈다.(엄마는 항상 생일에 미역국을 먹어야 인덕이 있다고 하셨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거의 그러지 못했다)


이제 남편 기일도 집에서 지내지 않고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지도 않는다. 대신 절에서 제사를 지내고 식당에서 생일 파티를 한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들은 아니다. 남편의 제사를 절에서 지내게 될 때까지는 35년이 걸렸고 생일에 미역국을 끓이지 않은 것은 거의 6,7년이 되어간다.


그저 세월 따라 상황 따라 시류에 얹혀 흘러간다. 네 번의 가족 행사가 며늘과 손녀가 생기면서 여섯 번으로 바뀌었고 밖에서 식사를 하지만 우리 각자의 생일 파티는 언제나 즐겁다.

아들이나 며늘이 제사나 생일 음식을 준비하느라 귀한 연차를 쓰지 않아서 좋고, 평소 가보고 싶었던 음식점을 찾아서 맛있는 음식을 먹어서 좋고, 가족 모두 모여 케이크 한 조각과 함께하는 보드 게임으로 '하하 호호' 할 수 있어서 좋다.


손녀가 1년 동안 생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과연 그런 날이 언제일까? 생각해 본다. 아무리 머릿속을 헤집고 캘린더를 넘겨봐도 딱히 하루를 꼽아서 기다리는 날은 없다. 하지만....


어쩌면 나는 매일 맞이하는 하루를 기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 지 모르겠다. 나의 하루가 언제 끝이 날지는 모르지만 글을 쓸 수 있어서, 손녀의 웃는 얼굴에 같이 웃을 수 있어서, 나의 아프고 힘들었던 시간들을 함께 견뎌온 아들들이 있어서 귀여운 엉뚱함이 있는 예쁘고 마음씨 고운 며느리가 있어서...


1년 중 가장 기다리는 날은 매일 기적처럼 와주는 바로 오늘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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