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O플릭스 애청자로서 19금과 정치를 주제로 하는 이야기만 아니면 거의 다 좋아하고 틈나는 대로 보는 편이다. 최근에 오픈된 드라마 속 램프의 정령 지니를 만나면서 '만약에'라는 세 글자에 잠시 머물렀다.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는 램프의 정령 지니는'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타락한다'라고 말한다. 가장 간절할 때, 절박할 때 그 사람의 눈의 띄는 램프는 그 절실함을 이용해 사람을 시험에 들게 한다.
죽은 사람 못 살리고 미래로 가는 것 안되고 이 두 가지 빼고 모든 소원을 다 들어준다는 램프의 정령 지니를 만났다.
포스터부터 시선을 끌었다. 램프를 들고 있는 배우 수지, 그 뒤에 김우빈 그리고 황금 가루가 넓게 쫘악 뿌려져 있는 만화 같은 그림부터 딱, 좋아하는 장르다.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들을 이야기로 만들어 들려주는 사람들의 상상력이 부럽고 대리 만족 할 수 있게 해주는 그들이 고맙다.
판타지를 볼 때면 종종 콜럼버스의 계란을 떠올리곤 한다. '아하~! 저렇게... 난 왜~ 저런 생각을 못하지?' 상상력이 부족한 나는 누군가 들려주는 '옛날 옛날에...' 같은 이야기들이 아주 흥미롭다.
크게 감정 소모 없이 가볍게 볼 수 있어서 좋고 워낙 희한한 일들이 많으니 가끔은 '이 넓은 세상 어디선가는 일어날 수도 있지' 하는 생각을 할 때도 있다.
이번 드라마도 역시 그럴 거라 짐작하면서 1회 차만 보고 매주 금요일을 기다리는 재미가 있겠다 했지만 모든 에피소드가 다 오픈되는 덕분에 결국 새벽 1시를 넘기고 잠자리에 들었다.(반나절을 몽땅 지니에게 빠졌다 ㅎ)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인간 군상을 보는 재미와 판타지스러운 이야기가 동화를 보는 것 같아서 좋았다.
천년을 기다린 램프의 정령 지니, 사이코패스, 그 사이코패스를 키우는 할머니, 그리고 천사, 지니와 천사가 모시는 그분...
사이코패스 손녀에게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가르치고 분노를 누를 수 있게 키워 낸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 사이코패스의 친구...
세 가지 소원을 통해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타락한다고 말하는 지니는 자신을 가둔 주인에게 복수하기 위해 천년을 기다렸고 그런 지니를 처단하기 위해 같이 천년을 기다린 천사.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전개...
주인에게 버려진 반려견의 소원, 소수성애자, 분노조절장애, 살인자과 엄마... 이야기 속 사람들의 다양한 심리...
지금까지 알고 있던 램프의 요정 지니와 극 중 램프의 정령 지니는 조금 다르다. 반지나 물병, 램프에 깃들어 있는 요정과 정령들이 전부 지니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가 아는 그 지니만 사람의 소원을 들어준다는 이야기.
코믹 로맨스답게 재밌다가 달달하다가 긴장감을 주다가 결국에는 권선징악으로 마무리하는 이야기였다. 따뜻한 인간미와 사랑이 있는 결말은 판타지나 애니메이션을 즐겨보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이 드라마 또한 뻔한 결말을 알면서도 마지막 회차까지 보면서 오랜만에 자정을 훌쩍 넘겼다.(항간에는 폭망작이라는 말을 한다고 하지만 그저 동화로 보는 나는 재밌었다,)
만약에...
지금 내 삶은 지난 어느 시간보다 평화롭다. 삶에 대한 절실함이나 간절함도 없고 나이에 맞게 적당한 건강 상태와 친구들과 밥 한 끼 정도는 할 수 있는 작은 여유와 이렇게 좋아하는 글을 쓰면서 인생 후반전을 보낼 준비도 하면서 느긋하게 보내고 있다.
부족하고 위태롭던 지난 시간 어디에서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일을 문득 생각해 본다. '만약에 램프가 내 손에 들어오고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나는 어떤 소원을 빌지?'
세 가지 소원은 우리나라 전래 동화에도 종종 등장한다. 사람의 어리석음과 탐욕으로 종국에는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어버리고 결국 타락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교묘한 장치다.
대개가 다 눈먼 희망이고 악마의 속삭임이었다. 절박함으로 가려진 눈은 자신이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후회와 몰락으로 타락한 인각을 나락으로 보내 버린다.
굳이 그런 이야기까지 만들어서 인간 본성을 파헤치는 속성과 나처럼 제삼자의 자리에서 그 이야기를 즐기는 사람, 대리 만족을 하는 사람 그리고 그 속에서 교훈을 얻는 사람들까지 세 가지 소원은 참 많은 것을 시사하는 스토리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알게 모르게 많은 지니가 나타났던 것 같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타락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믿음 덕분이다.
통장 잔고가 0였던 그 절박한 순간에 애인이 되면 매달 용돈을 주겠다고 했던 그 말을 들었다면...
빚을 내서 라도 투자하면 3개월 만에 10배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을 믿었다면...
묻어 두면 큰돈을 만질 수 있는 땅이 있으니 적은 돈이라도 공동 투자를 하자는 말에 솔깃했다면...
일을 하지 않고 그저 얻어지는 일에는 미련스러울 만큼 경계를 한다. 아무리 힘들고 아파도 혼자 끌어안아야만 했고 누구 하나 손 내밀 사람이 없었던 덕분에 그런 시험에 들지 않았는지도 모르겠다.
경제 활동을 왕성(?)하게 하던 시절에 나의 꿈과 소원은 언제나 같은 것이었다.
창작 작업을 하는 큰 아들에게 완벽한(?) 작업실을 만들어 주는 일.
둘째에겐 엄마의 반대로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모든 장비와 사무실을 차려주는 일.
모든 것이 돈이 있어야 이룰 수 있는 일들이었는데 나는 생각과 다르게 돈 버는 일을 제일 못했다. 그럼에도 언제나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지만 꿈 근처에도 못 가보고 이제는 입 밖으로 낼 수도 없는 요원한 꿈으로만 남았다.
그때 램프가 내 손에 들어왔었다면... 상상만으로 잠시 입꼬리를 올려본다.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그 일들은 이루지 못했지만 또 다른 소원이 생겼다. 램프의 정령 지니처럼 위대한 힘을 가진 누군가 꼭 들어주길 바라면서 매일 아침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이며 빌고 있다.
나를 아는 모는 사람이 하루빨리 아픔에서, 슬픔에서,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기원합니다.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원하는 일, 하고자 하는 일들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를 기원합니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이, 나와 인연 지으진 모든 사람들이 언제나 자유롭고 행복하기를 빕니다.
아울러 우리 가족들의 건강과 원하는 일들이 원만하게 이루어 지기를 기원합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내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 복댕이를 보면서 문득 세 가지 소원을 물어본다.
"복댕이, 램프의 요정 지니가 소원 세 가지를 들어준다면 넌 뭘 빌 거야"
질문이 떨어지기 무섭게 바로 대답을 한다.
"우리 가족 모두 천살 넘게 살게 해 주세요. 할 거야"
죽음의 의미를 다 알아버린 녀석은 언젠가 할머니도 엄마 아빠도 자신과 헤어진다는 사실에 대해 제일 슬퍼하면서 눈물을 글썽이는 일이다.
"그다음은?"
"손톱을 뜯지 않게 도와주세요."
"그리고 마지막은?"
"없어"
손톱을 뜯지 않게 도와달라며 소원을 마지막으로 세 가지를 다 채우지도 못하는 아이를 만나도 램프의 정령 지니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타락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