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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만 기억하는 오늘

너무 짧았고 너무 긴 사랑

by 힐링아지매


82년 11월 7일

22살, 26살 어린 신랑, 신부는 팔짱을 끼고 주례 앞에 섰다. 누가 주례를 봤고 주례가 무슨 말을 했는지 전혀 기억이 없다. 가장 강렬하게 남아 있는 것은 어린 신부는 층층이 레이스가 달린 하얀 공주 드레스에 핏빛처럼 선명한 빨간 카네이션 부케를 들었다는 것과 신랑이 검은색 정장에 검은색 넥타이를 매고 있었던 기억만 선명하다.


신랑, 신부 친구들과 단체 사진을 찍었고 그들과 함께 한 피로연회장에서 잘 마시지 못하는 술을 마시고 온몸이 빨갛게 변했던 그의 얼굴과 용감하게 마이크를 잡고 음과 박자를 전부 무시하며 모두에게 웃음을 줬던 순간들도 생각난다.(제주도에서 우리는 처가에서 부를 노래 한 곡을 2박 3일 동안 계속 연습했다)


제주도는 우리 둘 다 첫 여행이었고 유난히 옆에 찰싹 붙어 있다고 가이드 겸 택시 기사님에게 유쾌한 핀잔까지 들었지만 우리 둘은 참 많은 사진을 찍었다.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했지만 그 사진들은 아주 긴 세월 동안 앨범 속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2박 3일의 신혼여행 일정이 끝났지만 시어머니는 이틀을 더 밖에서 지내다가 들어오라고 했고 왜 그랬는지 아직도 모르고 앞으로도 알 길이 없다.

우리는 해운대 파라다이스 호텔에서 이틀을 더 보내고 시댁으로 갔다.


빨간 치마, 초록 저고리, 빨간 코고무신까지 신고 신혼부부 티를 팍팍 내며 깍지 손을 하고 백사장을 걸었고, 바람에 날리는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던 따뜻한 손길이 있었고, 선한 미소로 눈 맞추며 환하게 웃어 주던 그가 있었고, 주변의 화단에는 빨간 열매가 소복하게 매달린 먼나무가 있었다.




90년 4월 2일

짧디 짧은 우리의 시간이 멈춘 날이다. 며칠 째 목덜미가 서늘하더니 기어이 당신은 세상 인연의 끈을 놓고 우리 곁을 떠났고 그해 11월 7일은 죽을 만큼 서럽고 외로워서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해마다 11월 7일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날, 세상에서 오로지 나 혼자만 기억하는 당신 없는, 우리의 결혼기념일.

당신을 만나러 산소에 가보기도 했고 혼자서 술을 마시기도 했고 때로는 일부러 아무 날도 아닌 것처럼 외면을 해보기도 했지만 35년이 지난 올해, 지금도 여전히 놓지 못하는 날, 바로 오늘이다.


2025년 11월 7일

먼나무의 빨간 열매만 보면 아직도 가슴이 두근거리고 때로는 명치부터 목구멍까지 뭔가가 치고 올라온다. 그냥 모른 척 스쳐 지나가도 되는데 왜 굳이 다가가고 만져보고 사진도 찍는다.


내년 이 맘때에도 먼나무는 빨갛게 열매를 맺을 것이고 나는 다시 그 시간으로 돌아가 그의 다정한 손길과 선한 미소를 떠올릴 것이다.

난, 아직도 너무 짧고 너무 긴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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