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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칠드런 오브 코리안 맨

[관계] - 3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은 인류가 불명의 이유로 아이를 낳을 수 없게 된 세계를 그린다. 이 디스토피아 세상에는 한정된 자원을 통제하기 위한 전체주의 정권이 들어선다.


하지만 어둠 속을 꿰뚫는 빛이 한층 더 찬란한 법. 한 아이가 태어난다. 한창 총격전을 이어가던 정부군과 레지스탕스는 무기를 내려놓고 경이로운 마음으로 그 장면을 바라본다. 그 연약한 존재가 어찌나 신성해 보이던지. 한동안 여운이 이어졌다.


현재 지구상에서 이 영화를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건 한국이다. 2022년 기준 합계출산율은 0.78명을 기록했고, 하락 폭은 줄어들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이제 아이를 한 명만 낳아도 평균보다는 높다는 말이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한국은 착실하게 자연 소멸의 길을 걷고 있다. 그것도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이런 암울한 전망과는 달리 주변 분위기는 의외로 차분하다. 0.78명이 아니라 0.5명, 0.3 명대가 되어도 아마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정부는 변화 대책이 아닌 적응 대책을 내놓고 있고, 젊은 세대는 ‘출산 파업’을 선언한다.


2021년을 기준으로 국내 총인구는 순감소 추세로 돌아섰다. 전체 인구만 감소하는 게 아니라 노령화도 동시에 찾아온다. 한국의 높은 노인 빈곤율을 고려한다면 꽤 심각한 문제다. 노인 빈곤 해결에는 복지 정책이 필수인데 복지 재정을 댈 수 있는 젊은 세대 자체가 줄어들고 있으니.


다른 사회 지표와는 달리 인구는 꽤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대량으로 이민을 받거나, 출산율에 획기적인 반전이 있지 않은 이상 정해진 수순을 차근차근 밟아갈 예정이다. 현행대로라면 2070년경에는 인구가 3,000만 명대로 줄어든다.


그때까지 살아있지 않더라도 저출생의 영향력은 지금도 강하다. 2020년 기준 연간 출생아 수는 약 27만 명이다. 2017년 40만 명 대가 붕괴한 이후 감소 추세가 더 빨라지고 있다. 군대, 경제, 교육, 복지 재정 등을 감당할 인구가 그만큼 크게 줄고 있다는 뜻이다. 현재 한국 국군에 소속된 사병은 30만 명 정도다. 신체 건강한 남성이 병역의 의무를 지는 현 병역 체계에서 대부분을 징집해도 채울 수 없는 수다.


전국에 있는 4년제 및 전문대학도 정원을 채우기 어려워 보인다. 학령 인구 자체가 없으니, 지방대학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해있다. 장기적으로는 소위 말하는 ‘인서울’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 졸업자가 줄어들면 기업에서 일할 사람도 자연스레 귀해진다. 재화와 서비스를 구매할 소비자도 줄어든다. 내수 시장은 더욱 침체할 예정이다.


저출생은 기후변화와 더불어 현존하는 가장 심각한 위협이다. 공통점이 하나 더 있다. 누구도 경각심을 가지지 않는다. 이는 차라리 체념이라고 부를 만하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말고 조용히 운명을 맞이하자, 이런 식이다. 혹은 귀를 막고 애써 현실을 무시한다.


젊은 세대는 왜 아이를 낳지 않을까? 주거 문제, 극심한 경쟁, 이기심 등이 도마 위에 오르지만 어쩐지 본질을 짚지 못하는 느낌이다. 다른 나라에도 분명 같은 문제가 있을 텐데 왜 유독 한국이 더 심각한지를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을 바꿔보자. 극도의 저출생을 부추기는 한국만의 특수한 상황은 무엇일까?


한국은 일종의 섬나라다. 삼면이 바다로 막혀 있고, 위로는 북한이 있다. 동쪽으로는 드넓은 태평양이, 서쪽으로는 거대한 중국이 자리하고 있다. 특유의 배타적인 민족성까지 더해져 한층 더 독특한 국가가 되었다. 유례없는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그 성과만큼이나 진하게 달여진 부작용을 낳았다. 민주화가 자리 잡았음에도 그 부작용은 미처 가시지 않았다.


2016년 한국의 사회 갈등 지수는 OECD 국가 중 3위를 기록했다. 특히 빈부갈등, 세대 갈등, 남녀갈등에서 꽤 높은 수치를 보였다. 반면 정부의 갈등 관리지수는 30개국 중 27위를 기록했다.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은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다. ‘이해와 양보란 곧 손실이다.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상대방이 잘되는 건 못 본다.’ 이런 의식이 팽배해 있다. 한 마디로 여유가 없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고 하지만 한국의 경우는 다르다. 나라 전체로 놓고 보면 곳간에 곡식이 넘치는데, 모두가 자기 몫을 손에 틀어쥐고 사방을 경계한다.


계산기를 아무리 두드려 봐도 ‘출생=손해’라는 인식이 만연해 있다면 누가 아이를 낳을까? 아이를 갖지 않는 이유는 사실 간단하다. 그게 더 이익이 되는, 혹은 최소한 손해를 보지 않는 대안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익-손해란 경제적 문제에 한정되지 않는다. 그래서 육아비나 주거비를 지원해 주는 정도로는 저출생 문제를 타개할 수 없다.


저출생이 문제라면서도 노 키즈 존(No-Kids Zone)이 여전히 성행하는 나라. 육아 휴직을 다녀오면 그 길로 경력 단절이 되는 나라. 자기 집 한 채를 갖는다는 게 백일몽이 되어버린 나라다. 그래서 그나마 자기 몸 하나라도 건사하기 위해 비 출생을 선택한다.


아이를 낳는다는 건 일생일대의 결정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그저 한두 가지의 변수로 환원될 수 없다. 차라리 공기처럼 퍼져있는 일상을 관찰하는 게 더 효과적이다. ‘출산 파업’을 택한 이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경력 단절이나 주거 문제, 교육 문제, 양성 불평등 등을 그저 우는 소리로만 규정한다면 아무도 출생에 동참하지 않는다. 당장 인구가 부족하니 아이를 낳아달라며 애국심에 호소해도 마찬가지다. 이기적이라며 비난하는 건 최악이다. 눈 가리고 아웅 식의 어르고 달래기, 혹은 협박이 통하지를 않으니 이런 사태까지 온 게 아닐까?

출산율을 올리려면 닦달할 게 아니라 아이를 낳고 잘 살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잘 산다는 건 경제적 풍요로움을 넘어 탄탄한 사회적 인프라, 건강한 가치관, 개방성, 미래와 환경에 대한 숙고까지 포괄한다.


만약 1인당 GDP(국내총생산)를 올리는 정도로 문제를 풀 수 있다면 이미 진작에 해결되지 않았을까? 한국의 1인당 GDP는 3만 달러를 넘었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보다 높다. 설령 GDP가 4만 달러, 5만 달러가 되더라도 출산율이 극적으로 반전될 기미는 없다. 살고 싶은 국가를 만드는 건 모두에게 이롭다. 꼭 출생이 엮여있지 않더라도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목표다.


1970년대 초 당시 박정희 정부는 ‘잘 살아보세’라는 구호를 앞세워 경제발전을 위한 새마을 운동을 전개했다. 50년이 지난 지금, ‘잘 살아보세’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정말 ‘잘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신호가 저출생이다.


헬조선이니 불지옥 반도니 하는 자조적인 표현은 다소 유행이 지나 사그라들었지만 기저에 깔린 절망감마저 사라진 건 아니다. 어쩌면 지옥이라는 표현이 이미 기본값이 되어버린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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