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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거니 Dec 07. 2023

강남역 롤러코스터

[돈] - 2

미국 연방준비제도(이하 연준)에서 연일 금리 인상 기조를 유지하며 몇 년간의 저금리 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 소위 ‘동학개미운동’으로 불리던 개인투자자의 투자 의욕도 많이 저하되어 있다. 부동산도, 주식도, 암호화폐도 시원치가 않다. 오로지 달러만이 금리 상승 국면에서 몸값을 키운다.


불나방처럼 뛰어든 젊은 세대는 이제 삶의 위협마저 느낀다. 레버리지(부채)를 최대한 활용하는 전략이 성공하려면 한 가지 전제조건이 필요하다. ‘자산의 가격이 계속해서 상승할 것’


코로나19 사태 초기만 해도 꽤 잘 먹히는 방법이었다. 아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바보였다. 어떤 자산이든 집기만 하면 다음 날 수익을 낼 수 있으니까. 실물경기는 바닥을 쳤지만, 엄청난 유동성이 시장에 공급되면서 전체 가격을 끌어올렸다.


긴가민가하던 사람들도 기회를 잡기 위해 달려들었다. 특히 가진 것 없는 젊은 세대의 반응이 뜨거웠다. 자신이 흙수저 하나를 물고 태어났다고 여긴 이들은 계층 사다리를 조금이라도 기어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위로 올라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금의 젊은 세대가 유독 공정이라는 이슈에 민감한 건 ‘개천에서 용 나는 시대’가 끝났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윗세대가 침을 튀겨 가며 말하던 ‘노력’이 더 이상 먹혀들지 않는 사회, ‘부모를 잘 만나는 게 능력’으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공정은 심리적 마지노선이자 역린이다.


그런 의미에서 투자는 공정하다. 적어도 그렇게 보인다. 학연이나 지연, 부모의 재력이 영향을 미치지 않는 하얀 눈밭과 같다. 성별도, 출신 지역도, 나이도 가리지 않는다. 공포에 가까운 위기의식이 파도처럼 퍼져나간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소외되어서는 안 된다. 뭐라도 해야 한다.


파도가 위아래로 출렁이듯 시장도 마찬가지다. 미국 연준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가파른 금리 인상을 단행했다. 달러의 가치가 오르고 은행 이자도 올랐다. 미국과 발맞추기 위해 한국은행도 기준금리를 인상했다.


저금리만 믿고 무리한 대출을 받은 사람부터 찬바람을 맞기 시작했다. 자산 가격 상승률도 예전 같지 않다. 불패 신화를 자랑하던 강남의 아파트도 급급매가 아니면 팔리지 않는다. 코스피 시장도 횡보장으로 접어들었다. 코인 시장도 대형악재를 몇 번 맞더니 동력을 잃은 모습이다.


빚문서만을 끌어안은 이들은 황망하게 시장을 바라본다. 언젠가 다시 올 파도를 기다리면서. 하지만 그렇게만 시간을 보내기에는 너무 막막하다. 그나마 남은 재산을 투자 자산에 베팅해 보지만 결과가 시원치 않다. 금리 상승과 더불어 이율이 오른 예·적금에 사람들이 몰린다. 거대한 고래가 빠져나간 자리에 새우들이 모여서 다음 기회를 엿보고 있다. 언젠가는 이 지긋지긋한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 하나를 품고서.


경기가 나쁠수록 복권이 잘 팔린다고 한다. 흔히 말하는 ‘로또 명당’에 줄을 서서 경건한 마음으로 종잇조각을 받아 간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탈출구가 보이지 않을 만큼 절망적이니까. 그러니 이런 행운에라도 기대는 게 뭐가 나쁘냐고 항변하면서.


부의 양극화로 인해 천장이 막혀있는 상황에서 아래로도 끝없는 추락이 이어진다. 과거에는 부족한 복지정책을 가파른 경제성장이 정당화했다면 이제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개개인의 노력 탓을 하기 민망할 정도로 자산 가격이 치솟았다. 돈이 돈을 버는 구조다.


특히 큰 자금력이 없으면 접근하기도 어려운 부동산에서 막대한 부를 거머쥔 이들이 등장했다. 새우가 고래를 따라잡으려면 다른 사람의 힘을 빌려야 한다.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리고 그 분투기의 결말을 현재 모두가 목도하고 있다.


부는 상대적이다. 내 자산은 그대로 있더라도 옆집, 윗집에서 대박이 터지면 상대적으로 가난해진다. 벼락부자를 빗댄 ‘벼락 거지’가 대표적이다. 곳곳에서 투자에 성공한 이들이 축포를 터뜨리는데 소외될 수 없다는 공포감이 자리한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얼마 안 되는 투자금을 가지고 투자 시장에 뛰어든다.


누군가는 ‘강남 아파트를 살 기회’를 만들어줘야 한다고 역설한다. 나만 뒤처질 수 없다고, 나도 부자가 되고 싶다고 목 놓아 운다. 하지만 모두에게 강남 아파트를 주는 건 가능하지도 않을뿐더러 바람직하지도 않다.


그래서 ‘강남 아파트를 살 자유’보다 우선시되어야 할 건 ‘강남 아파트에서 살지 않더라도 괜찮을 자유’다. 대박을 터트리지는 않더라도 쪽박을 차지 않게끔 해야 한다. ‘강남불패신화’는 부의 집중 현상이 만들어 낸 부작용이다. 이미 자산이 많은 이들에게 더 많은 부를 안겼고, 어떻게든 따라가려던 이들에게는 큰 빚을 안겼고, 게임에 참여하지조차 못한 많은 이들에게는 박탈감을 안겼다.


그렇다고 강남을 다 밀어버리자는 무모하다 못해 순진한 주장을 하고 싶지는 않다. 사실, 문제는 강남 그 자체가 아니다. 소수의 이권을 보호하기 위해 자본 권력이 멋대로 휘둘러진 게 본질이고, 그 대상이 ‘강남 아파트’가 되었을 뿐이다.


강남 말고도 대안이 있다면 시장 논리에 따라 가격은 자연스레 안정화된다. 수요가 분산되면 철옹성 같던 강남불패신화에도 조금씩 균열이 간다. 한국의 인구 및 자본집중 현상은 세계적으로도 심각한 상황이다. 한껏 달궈진 시장에서 조금씩 김을 빼야 한다.


대안적 삶은 전체주의적 시각을 버리고 나에게 맞는 인생을 꿈꿀 수 있는 초석이 된다. 이는 개인의 의지만으로 형성되기가 어렵다. 의식도, 제도도, 사회도 변화해야 한다. 개인은 사회의 영향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으므로. 부디 ‘강남 아파트’에서 살지 않아도 잘 살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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